이 소설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사랑이 등장한다. 우선은 주인공 알리스의, 어린 시절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보이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 그 뒤로 어머니와 아버지, 어머니와 어머니의 연인,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25년이 지난 후 만나게 된 어머니의 옛 연인에게서 느끼는, 간신히 스칠듯한 알리스의 감정이 드러난다. 사람은, 완전한 암흑처럼 고독한 사람일지라도 그 뒤에는 이런 저런 색색가지 사랑의 끈들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닐까. 마치 도화지 위에 여러 가지 색을 칠하고 그 위를 검은 색으로 완전히 덮은 후 날카로운 칼끝으로 긁어내면 조금씩 드러나는 바탕색들이 또 다른 그림을 연출해 낼 때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어두운가 하면 빛이 있고 깃털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폐부를 찌른다. 그 끝에는 소설 속의 문장에서처럼, 순백의 세계가 펼쳐져 있어서 어린 시절 꿈처럼 바람타고 혼자서 그 세계를 향해 날아가고 싶은 은밀한 사랑의 꿈들을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 내 이름은 알리스 그랑제. 30세
“오늘은 2006년 7월 21일. 저녁 여덟시. 영화감독 제라르 우리가 어제 사망했다. 이 모든 건 명백하다. 확인 가능하다. 나는 모르는 한 남자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이것도 여전히 현실이다. 이 남자는 내 어머니를 사랑했다. 내 어머니는 이 남자를 사랑했다. 이 점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이 남자는 내게 어머니 이야기를 해줄 것인가? 모르겠다. 어머니에 관한 뭔가를 되찾게 될까? 모르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일까?
내 이름은 알리스 그랑제. 30세. 난 어머니를 찾고 있다.” --- 본문 중에서
-- 내 아버지
“그를 사랑했다, 알리스, 네 어머니는 그 남자를 사랑했어.”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 난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 본 기억이 없었다. 난 종잇장처럼 떨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눈치챌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이미 멀리 있었다. 죽음을 향해 기울어가고, 소멸되어 가면서 최후의 체념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아버지의 눈꺼풀 아래로 무엇인가가 지나갔다. 전율이었다. 말하는 사람이 나인가 싶게 나는 물었다. 목소리는 기어들어 갔고 귀에 거슬릴 만큼 낯설었다.
“그게 누구예요, 아빠?” --- 본문 중에서
-- 내 어머니 블랑딘 그랑제
난 엄마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요. 블랑딘, 당신은 누구죠? 어떤 사람이었나요? 어떤 여자였죠? 꿈은 있었나요? 고민은요? 왜 아버지와 결혼했어요? 그 남자는 왜 만났죠? 누굴 사랑했어요? 둘 다 사랑했나요? 한 사람만 사랑하기로 마음 먹었나요? 난 왜 낳았죠? 그냥 나를 원한 건가요? 난 엄마에게 어떤 존재였어요? 날 어떻게 생각했죠? 엄만 날 어떤 눈길로 바라봤어요?
엄마는 마지막 순간에 내가 한평생 엄마를 얼마나 찾아 헤맬지 생각이나 해 봤어요? 끝없이 엄마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예요. 그 공허감이 바로 내 인생이 될 것을 상상해 봤어요? 그래서 고통스러웠나요? 그래서 날 더 사랑했어요?
엄만 날 사랑했나요? --- 본문 중에서
-- 에마뉘엘 바지니, 화가, 파리 11구 생 사뱅 가 10번지
B로 시작되는 이름 차례다. 손가락으로 짚어 내려간다. 훑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다. 책장을 넘긴다. 다시 한 번 손가락으로 짚어 내려간다. 머리가 어지럽다. 가벼운 현기증. 갑자기 손가락이 멈춘다. 에마뉘엘 바지니, 화가, 파리 11구 생 사뱅 가 10번지.
다른 이름들, 그 속에 감춰진 인생들은 이 긁은 글씨체의 이름 하나만을 남기고 이 세상에서 모두 사라진 듯했다.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주소를 베껴 적는다. 초등학생처럼 열중하며 이해하진 못하지만 일단 적는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처럼. 난 아주 착한 학생이다. 나중은 나중에 할 것이다. 확인은 나중에, 경험도 나중에 할 것이다.
지금으로선 옯겨 쓸 수 밖에 없다. 한 자씩 또박또박.
연필을 내려놓는다. 에마뉘엘 바지니. 이 이름을 입에 올려 보려 한다. 잘 되지 않는다. 에마뉘엘, 그래, 에마뉘엘, 이제 됐다. 부드러운 이름이다. 익숙해질 수 있을 것 같은 이름이다. 하지만 성은 그렇지가 못하다. 목 속에 잠겨 나오지 않는다.
다시 읽어 본다. 분명하게 잘 적었다. 일어나기 전에 아주 잠깐 망설이다가 눈을 감는다. 아주 재빨리 숨을 내쉬며 발음해 본다. “블랑딘과 에마뉘엘.”
블랑딘과 에마뉘엘, 자, 됐다. 드디어 그 이름들을 입에 올렸다. 알고 보면 아주 간단한 일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