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의원 모임]에서 만나는 우상호 의원은 아직도 문학청년이다. 작품을 읽어내는 눈이 예리하다. 좋은 구절을 읽는 동안 그의 눈은 반짝인다. 한눈에 좋은 시인지 아닌지를 알아내는 감각이 여전히 살아 있다.
- 도종환 (시인)
조용히 이 책을 읽다가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그것은 내 혼미한 정신을 일깨워 주는 새벽종소리이기도 했다가 또한 하루 일과를 마친 나를 평화로이 감싸는 저녁종소리이기도 했다. 무엇이 그를 새벽까지 잠 못 들게 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글들, 모쪼록 이 책이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과 위안으로 다가가길 바란다.
- 이정하 (시인)
그는 정치하기 전에 대학 시절을 함께 했던 문학 친구였다. 시골의 가난한 촌놈들이 꿈꾸었던 문학의 길을 가지 못했다. 시인은 누구보다 먼저 시대를 아파하는 사람이다. 이 책에서 시인의 마음을 잃지 않는 정치인 우상호를 읽는다.
박래군 (인권 활동가)
그 시절에는 왜 그렇게 술을 마셨을까? 비 오는 날 술집 골방에 앉아서 안주도 없이 술을 마시다 보면 서로가 그런 말들을 했다.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와 있는 사람들 같다고, 뒤돌아가는 것은 부끄럽고 담을 넘을 용기는 없다고, 그러니 술이나 마시자고 그랬을까?
술값이 없어서 학생증을 맡기고 술집을 나오면 누군가 외쳤다.
“야, 2차 가자!”
“야, 지금 돈이 없어서 학생증 맡기고 나왔다. 인마, 정신 차려!”
그러면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에 나오는 대사를 읊조렸다.
“그대에게 돈이 있는가를 묻지 말고 술 마실 의사가 있는가를 물어라!”
그러고 그는 자신의 학생증을 빼 들었다.
“아직 우리에게 희망은 남아 있다!”
그것을 희망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지만, 어쨌든 한잔 더 한 것은 사실이다.
---「 사람이 있는 풍경」중에서
미군들 중에는 주로 여자아이들에게만 시레이션을 던져 주는 병사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런 특성을 간파하고 한두 살짜리 여동생을 안고 뛰는 약삭빠른 녀석도 있었다.
대개는 달음박질하면서 소리 지른 보람도 없이 돌아서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럴 때면 예의 바른 한국의 어린이들이 미군들을 그냥 섭섭하게 보낼 리가 없었다. 멀어져 가는 미군을 향해 일제히 쑥떡을 먹이는 것이었다.
“에라이, 이거나 먹어라. 양키들아.”
어린이들이 먹으라고 한 것을 그들이 먹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개 미군 병사들도 그런 결말을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집」중에서
결국 문제는 수도 요금을 연체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인이 나가라는데 할 수 있나. 다음 날 3호실 가족은 리어카에 짐을 실을 수밖에 없다. 단칸방 생활이 이러니 서로 주인에게 책을 잡히지 않으려고 아이들 단속을 모질게 했다. 그리고 집주인에게 빌붙어서 고자질하는 11호실 아저씨, 그는 셋방 사람들의 요주의 대상 1호였다.
우리도 1년 후에는 이 집을 나와서 종암동 49번지 2호, 이인길 씨 집으로 이사를 했다. 요즘은 세 들어 살아도 층수와 호수가 다 따로 있지만, 이때만 해도 주인집 성함이 꼭 주소에 들어갔다. 이인길 씨 집은 홍광춘 씨 집 같은 벌집이 아니어서 세 가구 정도가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거기다 우리 방은 본채나 다른 방과는 독립된 방이었다. 그 방으로 이사 갔을 때의 감격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벅차다.
---「 가난한 도시」중에서
군대에서 일기를 쓰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특별히 조심해야 했다.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자유로웠기 때문에, 나는 활자가 인쇄된 곳을 제외한 위아래의 여백에 글을 썼다. 여백이 좁았기 때문에 대개 서너 줄 정도로 단상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남들 보지 않게 일기를 쓰려니 때로는 화장실에서, 혹은 빨래를 말리다가 혼자 남았을 때 재빨리 일기를 썼다. 불침번을 서다가 달빛에 의지해 쓰기도 했고, 쓰레기를 버리다가 쓰기도 했다.
이 작업은 3년간 계속되었다. 성경책의 첫 빈 공간에서 시작한 일기는 제대할 무렵이 되자 거의 끝 페이지에 다다랐다. 성경책을 항상 상의 윗주머니에 넣고 다녔기 때문에, 비 오는 날 행군하다가 온몸이 빗물에 젖으면 만년필로 쓴 일기 부분이 빗물에 번져서 잘 알아볼 수 없기도 했다.
---「 이등병의 은밀한 일기」중에서
나는 촌놈이었고,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했으며, 등록금이 없어서 대학 내내 고생했다. 작은형이 자살한 이후 어머니의 유일한 꿈은 내가 잘 되는 것이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이를 악물면서, 너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내 성장 과정의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원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었다.
구속되어 감옥에 갈지도 모르고, 좋은 직장은커녕 공장에 취업하게 될 것이며, 심지어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렸다. 누군가가 내게 건 희망을 꺾어 버린다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절망이 될 것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행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날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나는 고통스러웠다.
---「 세상의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