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대부분의 백인 유권자는 인종정책에 대한 분명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말란의 국민당은 아라파트헤이트를 제시했다. 아라파트헤이트는 보다 엄격하고 강화된 격리를 묘사하는 일종의 신조어로서, 각 인종을 특정지역에 거주하도록 제한하고 아프리카인 노동자를 농장이나 도시에 할당하는 것이었지만, 각 인종이 자신의 문화와 일을 영위해 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에 반해 스뫼츠의 통일당은 단호하게 남아프리카의 전통적인 인종질서를 옹호했다. 전통적인 인종질서하에서 국가는 지역사회가 자발적으로 격리를 실시하도록 도왔지만, 아프리카인의 도시화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서구문화로의 점진적인 동화가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 밖으로 승리는 단지 40%의 득표를 한 국민당에게 돌아갔다. 국민당은 우선 더 많은 백인의 지지를 얻고자 인종간의 결혼을 금지하고, 보편적인 인종등급화를 위한 절차를 만들어냈으며, 1950년에 제정된 집단지역법(Group Areas Act) 아래 강제격리를 위한 기구를 설립하는 따위의 조치를 취했다. 이후 신뢰와 지지도가 높아지면서 국민당의 강령은 '적극적인 아파르트헤이트'로 확대되어, 분리된 반투 교육체계(Bantu education system)를 비롯하여 다양한 아프리카인 부족들을 위한 자치적이지만 종속적인 농촌의 홈랜드(Homeland)를 포함시켰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정부들이 격리 관련법률을 제정했다면, 국민당 정권은 그것을 실행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가장 새로운 점은 정책이 아니라 힘이었다. 그 힘의 원천은 산업국가의 증가하는 부와 행정능력, 전후 세계에서 널리 일반화된 국가의 개입과 사회공학에 대한 신뢰, 국민당에게 흑인에 대한 무자비한 처우를 정당화할 수 있게 해준 인종주의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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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경 아프리카 대륙 대부분의 나라가 독립을 달성하자 모든 것이 희망적으로 보였다. 내셔널리즘은 가장 근대적인 국민국가들을 모방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즉 농경사회의 최소정부가 아니라 산업화된(특히 사회주의적인) 세계의 개발계획과 관료적인 지배를 모방했다. 내셔널리즘 세력은 식민주의가 자국의 발전을 지체시켰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은 놀라운 정치적 성공으로부터 신뢰를 이끌어냈고, 단지 예속민으로서 경험했을 뿐인 정부와 법의 힘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또한 급속한 경제적 진보 여하에 따라 허약한 정권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다. 은쿠르마 같은 일부 정치인들은 선진국을 따라잡고, 그토록 오랫동안 부정당해온 자기 인종에게도 존경을 받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을 감지했다.
여하튼 모든 나라는 1950년대에 급속한 경제성장을 경험했는데, 당시 상품가격이 높아 식민정부들은 인프라스트럭처에 역점을 둔 개발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다. 1951년에 정권을 잡은 은크루마는 황금해안의 경제개발계획을 그대로 본떴지만 런던에 축적해 둔 코코아 수입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간을 반으로 단축하여 계획을 완수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자산말고도 대부분의 신생국은 상대적으로 적은 공채와 광대한 토지, 그리고 자유농민들이 있었다. 그들은 빈국(貧國)이긴 했지만 세계최빈국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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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하게 하는 것'이라는 뜻의 렘바는 복통. 호흡곤간. 불임의 증상을 나타내는 일종의 병으로, 수장, 무역상, 성공한 노예 같은 중상주의적인 엘리트를 괴롭혔다. 아마도 진짜 질병은 그들의 질투와 사술이 낳은 불안감이었을 것이다. 렘바병의 치료법은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렘바회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이 렘바회는 서로를 보호해 줄 수 있고, 그들의 유혹적인 주장처럼 자기 종족들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는 세력가들로 구성되었다. 렘바 치료사들은 북과 팔찌를 이용했는데, 팔찌에는 개오지 조가비가 달려 있었다. 그들은 시장을 통제하고 분쟁을 판결했으며, 적도 아프라카의 반을 가로지르면서 정치적 경계선을 넘나드는 무역체계의 치안을 유지했다. 렘바 의식은 20세기 초에 노예무역과 함께 사라졌지만, 노예무역의 다른 결과들과 마찬가지로 카리브 해에서는 지속되었다.
렘바는 노예무역을 지속시키기 위한 제도를 만들거나 현실에 맞게 순응시키는 특권적 아프리카인의 능력을 잘 보여준다. 이는 보다 큰 규모의 사회에서도 확인된다. 종족에서 발전해 나온 카누하우스나 알라다의 제도를 바탕으로 건설된 다호메 왕국처럼, 아프라카에서는 가장 혁신적인 정치체제조차 앞선 모델을 모태로 해서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작은 소규모 사회의 특권적인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수 없다. 아프리카 사회에서 가족이 가장 중요했다고 한다면, 가족의 파괴는 노예에게 가장 뼈아픈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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