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와인의 추억은 여섯 살 때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였다. 여섯 살 때라고? 하지만 오해는 마시길……. 그 어린 나이에 와인을 마시게 된 건, 프랑스에서는 아이들에게도 와인을 마시게 허락해서가 아니라 실수였으니까 말이다. 가까운 친척의 결혼식 날, 무척 목이 말랐던 나는 물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빨갛고 투명한 액체가 가득 담긴 잔들을 보게 되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한 잔을 들어 꿀꺽꿀꺽 들이켰다. 으악! 그것은 여섯 살짜리 꼬맹이가 마시기에는 너무나 강렬한 맛의 앙트르되메르Entre-Deux-Mers 와인이었다. 일반적으로 와인의 알코올 도수는 10~14도에 이르니, 나의 첫 잔은 그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 p.7「와인, 좋아하세요?」중에서
한국을 마음의 고향으로 품고 사는 나는 와인을 접한 지 벌써 20년이 되었다. 몇 년 전에는 보르도의 와인 스쿨에서 학위도 받았다. 그러나 와인은 여전히, 순간순간 내가 몰랐던 새로움으로 다가오곤 한다. (중략) 와인이라는 주제는 바닥이 없는 우물과도 같아서 파면 파내려갈수록, 맛보면 맛볼수록 아직도 새롭게 발견해야 할 것이 수천 가지라는 현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한 번 사는 인생이 너무 짧게 느껴질 정도다. 이쯤 되면 너무 어려운 주제가 아닌지 걱정이 되겠지만, 와인이 ‘맛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면 와인 공부에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다. 그 ‘공부’라는 것이 새롭고 다양한 와인들을 접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p.9「와인, 좋아하세요?」중에서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집중 코스를 선택한 나는, 매일 아침 8시 반이면 보르도 와인 스쿨로 가서 강사와 일대일로 오전 내내 이론 수업을 받았다. 학생은 나 혼자였기 때문에 한눈팔 수도 없었고, 질문을 피할 수도 없었다. 아로마를 구별해내고 와인을 맛보는 것 역시 모두 내 몫이었다. 점심 식사도 수업의 연장이었다. 와인을 곁들여 점심을 먹으며, 옆에 시음 노트를 끼고 음식과의 궁합을 비롯하여 와인에 대한 느낌을 적곤 했다. 오후에는 그 지역의 가장 유명한 그랑 크뤼와 같은 ‘아펠라시옹(appellation, 생산지 명칭)’을 쓰는 아주 작은 와인 생산 농가를 방문했다. 주로 가족들이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림엽서 속 풍경처럼 멋진 곳들이었다. 저녁에는 와인 업계의 전문가, 생산자, 수입업자, 네고시앙(negociant, 중간도매상)들과 만나는 기회도 있었다. 늘 와인과 함께하는 그야말로 열정이 가득한 시간이었다. --- p.20「보르도를 향해서」중에서
프랑스인이라고 해서 와인의 라벨만 보고 그 와인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보르도 와인 스쿨을 다니기 전까지는 라벨을 봐도 대충 짐작만 할 뿐이었다. 특히 프랑스 라벨을 포함한 유럽 라벨의 경우가 그랬다. 시음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르는 브랜드가 붙어 있는 와인 병 앞에서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 pp.53~54「프랑스인과 와인 라벨」중에서
와인은 영구히 보존되는 것이 아니므로 일부 백화점, 와인 전문매장이나 와인 수입 업체들은 가끔 제품 회전을 위해서 대대적인 와인 세일 행사를 열기도 한다. 세일이라고 해서 재고 정리나 낮은 품질로 연결지으면 오산이다. 할인 제품이긴 하지만 유통 기한이 지난 제품들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라벨이 찢어지거나 더러워진 경우에 와인 맛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도 제 가격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할인을 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 이런 이유로 원래 가격이 4만 원도 넘는 칠레산 에스쿠도 로호 2004 빈티지 와인을 1만 원대에 살 수 있었다. 물론 와인 맛은 최고였다. --- p. 90「와인을 알뜰하게 사는 비결」중에서
아로마를 굳이 처음부터 전문 용어로 표현할 필요도 없다. 양조 전문가나 소믈리에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느낌을 즉흥적으로 표현해내면 된다. 중요한 것은 그 느낌을 자신이 다시 떠올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표현해내는 것이다. 다듬는 것은 나중에 하면 된다. ‘동물성 향’이라는 것을 표현할 때 사냥 고기보다는 보쌈 향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와닿는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된다. 우선은 여러분을 위해 표현하는 것이다. 와인 한잔 마시는 것이지 시험 보는 게 아니니까. (중략)
와인을 마시기 전에 한번 냄새를 맡아볼 것을 권한다. 그리고 여러분의 판단을 믿어야 한다. 퀴퀴한 냄새, 설익은 냄새 같은 나쁜 냄새가 난다면 와인 또한 나쁜 것이다. 와인의 결함은 맛보기도 전에 눈에 가끔 드러나고, 코에는 자주 드러난다.--- pp. 140~141「와인을 음미하는 방법」중에서
그렇다면 좋은 와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간단하고 솔직하게 답한다면 아무런 결점이 없고, 음식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여러분의 입맛에 맞아 마음에 드는 바로 그런 와인이 좋은 와인이?. 와인은 기분 좋으려고 마시는 거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옆 사람에게 와인이 맛있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다. 단지 개인적으로 와인이 마음에 드는지는 물어도 된다. 그렇게 묻는 것은 아주 다른 것이다.
--- p.149「맛있는 와인은 어떤 걸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