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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해즈빈

우울한 해즈빈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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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2월 02일
쪽수, 무게, 크기 152쪽 | 277g | 135*195*20mm
ISBN13 9788925531564
ISBN10 8925531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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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객센터, 이른바 ‘고충처리반’으로 발령이 났다. 누가 봐도 좌천이었지만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사교적으로 변했다. 부서 내 회식자리에도 가자는 말이 나오면 대개 참석했고, 그때까지는 피하기만 했던 동기 모임에도 한두 번 발걸음을 하게 되었다. 후배 직원 때문에 골치 아프다는 동기의 불평을 들어주고, 입사할 때는 정보처리 자격증이 하나도 없던 동기가 미국 출장 갔다 사가지고 온 기념품을 웃는 얼굴로 받아 들었다. 어쩌다 동기가 고객지원 업무는 어떻냐고 물으면 명랑하게 대답했다.
“너무 좋아. 6시에 칼퇴근할 수 있거든.”
신경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부터다. --- pp.120~121

구마자와는 내 허리에 자기 어깨를 살짝 부딪쳤다. 그의 어깨가 닿은 부위를 얼른 손으로 가리고 바짝 긴장한 채 서있는 나를 구마자와는 재미있다는 듯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내 눈에는 보인다. 너는 지금까지 말간 물속에서 살아왔겠지만, 아무리 봐도 행복한 얼굴은 아니거든. 어쩌면 나와 같은 부류일지도 모른다 싶었어.” --- p.47

얼마 전 A반으로 올라간 나는 4층에서 내렸다. 5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 표시등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나보다 더 우수한 부류가 있다는 현실이 무겁게 와 닿았다. 나이도 같은데. 저렇게 조그만 남자애가 할 수 있는 것을 내가 못 하다니. 분한 마음이 들었다. 난 아직 모자란다. 노력이 부족하다. 좀 더 분발해야 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해.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5층 표시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한 달 후 S반에 입성했다. --- pp.38~39

“당신은 지금 당장 아이를 갖고 싶지 않은 거야, 아니면 앞으로도 계속 낳지 않겠다는 거야?”
아, 그 얘기야? 나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대답해봐.”
“당신, 우리가 한 약속 기억해?”
“당신은 결혼하는 것도 내키지 않아 했지만 일단 해보니 나쁘지 않았잖아. 아이도 그렇지 않겠어? 나는 내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어.”
섹스를 구걸할 때 보이는 겁먹은 듯한 표정이 더없이 심각해졌다. 강렬한 의지를 담고 있는 그의 눈빛에서 공포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 pp.56~57

사과주스를 비우자마자 뜬금없이 구마자와가 생각났다. 벽에 걸어둔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그의 번호를 찾았다. 하지만 선뜻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가만히 화면만 응시했다. 어쩌다 그와 다시 연결되었을까? 그리고 어째서 나는 그와 연결되려 애쓰는 걸까? --- p.92

딸아이는 어깨에 큰 가방까지 멘 아이엄마의 피곤한 표정과는 정반대로 가녀린 팔을 엄마 목에 감고 세상천지 무서울 것 하나 없다는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작은 입술 사이로 침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참 좋겠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그 자리에서 불쑥, 그러나 격하게 기도했다. 그 시절로 돌아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할까? 지금과는 다른 인생, 예를 들어 다른 학교에 들어가 다른 직업을 가졌을까? 다른 남자를 만나 다른 곳에서 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전혀 다른 뭔가를 보고 있을까? --- pp.137~138

해즈빈. 구마자와는 그 단어를 절대 입에 올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입 밖으로 내면 쓸데없이 상처 받고, 그러면서 더더욱 나락으로 추락해버릴 것이다. 우리는 이제 서른이 된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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