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특별법 관련 현상수배자. 붙여진 지 오래 되었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척 보기에도 그것은 오래된 나무 상자처럼 남루하고 초라했다. 하긴 현상수배 전단이 뮤지컬 공연 포스터처럼 화려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수배자로 낙인 찍힌 이들의 면면을 무심히 살폈다. 군 출신 전직 장관의 얼굴도 보였고 지방경찰청장의 얼굴 아래에도 몇 백만 원의 수배 금액이 적혀 있었다. 뭘 보냐. 지들끼리 짜고 도는 수작을. 이미 얼큰하게 술이 된, 키 큰 친구 하나가 차연의 어깨를 쳤다. 여기, 이 사람은 누군데 얼굴이 안 나와 있지? 모두 여덟 명의 현상수배자 이름과 죄명이 소개된 가운데, 사진 들어갈 자리가 하얗게 비어 있는 사람이 있었다. 전형근. 안기원 대공수사국 차장. 불법 감금 및 독직 가혹행위. 그렇게 쓰여있다. 가면귀신 몰라? 어린노무 자식 같으니.
가면귀신. 그때 처음 그의 이름을 들었다. 잘 자던 아기도 그 이름만 들으면 가짓빛으로 경기를 일으킨다는. 취조실에서 그를 만난 사람이라면 누구든, 길어도 사흘 안에 그들이 원하는 답안대로 자백을 하게 만드는 고약한 고문 기술의 소유자. 피고문자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 그는 흰 마스크와 코와 입을 가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가혹 행위를 당했던 수많은 피해자 가운데 그의 얼굴을 확실히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고문 피해자에게 흰 마스크는, 정체불명의 익명성이 주는 구체적인 공포의 상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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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 그 친구, 사이보그더군요."
"사이보그?"
"과학수사국 사람들이 자세히 설명을 하던데, 레플리컨트? 그게 정확한 명칭이랍니다. 생물학적 소재로 만들어진 유전자 합성인간. 어렵죠?"
"그 사람이 그럼."
"사람이 아니었던 거죠. 완전히 속았지 뭡니까. 이건 플라스틱 꽃을 보고 예쁘다 향기롭다 감탄했던 꼴이니."
"아이구 머리야."
"고정하세요. 더 들으셔야 할 말이 많습니다."
끄르륵, 탄산가스 트림을 뱉어낸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네덜란드 같은 나라는 이미 국민 1만 명 당 한 명이 레플리컨트라는군요. 그 얘기 듣고 저도 되게 놀랐습니다. 물론 광물 채취 단지나 핵 처리 시설 같이 허가된 지역 외에 거주할 수 없게 되어 있죠. 문제는 그 관리가 불법체류자 다루는 만큼이나 힘들다는 겁니다."
"왜요?"
"사람과 구별이 힘들기 때문이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만 해도 김시민이, 뭐냐,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을 꿈엔들 가져봤습니까."
"그렇군요."
"보이트캄프 머신이라는 기계로 동공 근육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게 통상적인 색출법이랍니다. 그러니 찻길 막고 음주 단속하듯 레플리컨트를 골라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거죠. 여권 같은 거야 돈 3만 원이면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는 문제고, 쌍소리 좀 하자면 이거 졸라 불공평한 일 아닙니까? 나처럼 로봇 다리 하나 해 넣은 놈은 척 보기에도 다리 병신인지 알 수 있고, 몸 전체가 인조 유기물로 만들어진 그것들은 섹스파트너조차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다니." (중략)
"레플리컨트들은 일생에 단 한 번, 죽는 순간에만 고통을 느낀다고 합니다. 정밀하게 조합된 생체 회로가 끝내 작동을 멈추고, 신경 전류는 그 수치가 습속히 올라가고, 독립된 조직들은 오류 데이터를 받아들이며 기계적인 손상을 일으키고, 과열이 되고. 뇌 조직의 활동이 멈출 때까지 연소 시간은 10분 안팎?"
"끔찍한 일이군요."
"끔찍하죠. 세상 구경을 한 지 7년 만에 처음으로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접하며, 생을 느끼며, 그렇게 삶을 마감했으니."
"7년?"
"최대 7년으로 생명이 제한되어 있다더군요. 기술적인 문제 때문에 그 이상 견디는 유기 생물체는 아직 만들지 못한답니다. 그래서 설계 당시부터, 아예 수명을 7년으로 제한하는 장치가 내장되어 있다는 거죠. 통조림 바닥에 유통기한을 찍어 넣듯."
"그럼 김시민이, 일곱 살이었다는 말인가요?"
"애매한 문제네요. 만들어질 적부터 이미 20대 초반의 신체와 지식 수준 등이 프로그램 되었을 거 아닙니까. 그 상태로, 말하자면 20대 초반으로 7년을 살아갔으니. 이걸 일곱 살이라고 해야 하나 20대 초반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20대 후반이라고 해야 맞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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