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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발렌타인 그리고 홀리

루스, 발렌타인 그리고 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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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2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236쪽 | 260g | 128*188*20mm
ISBN13 9788995834992
ISBN10 8995834994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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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그녀가 지금은 어디에서 그 멋진 드레스 자락을 끌고 노래를 부르는지 알 도리도 없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만은 두툼한 책장 사이에서 단번에 찾아낼 수 있을 만큼 너덜너덜해진 페이지, 시간의 선명한 낱장을 차지하고 있다. 99번지의 그 집이 아무리 그녀의 존재를 나로부터 감추려고 몸부림쳐도, 어느새 그 페이지는 펼쳐지고 오르골 인형처럼 그녀의 모습이 모든 시간의 바늘을 정지시키며 내 기억너머로부터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 p.12

"그 음악 들으면서 다른 여자 생각을 해요."
"오!"
엘리는 고개를 돌려 코제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 그녀의 강의를 듣게 되면 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면 그녀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밤중이 되어 에머슨과 호손과 밀턴의 책들에서 눈을 떼고 기숙사 방으로 돌아오면 LP판을 데크에 걸고 침대에 벌렁 누워 잠들 때까지 홀리를 생각했다. 왜 나는 뒤늦게 홀리를 떠나 이곳에 와 있을까, 왜 나는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가슴 저리게 그리워하면서도 왜 우리는 이렇게 먼 곳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것일까. --- p.17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게 되리라는 걸 예감했어요. 이윽고 그가 인사를 건넸어요. 결심했다는 듯이, 마치 받아들이기 힘든 운명을, 훗날 배신할 걸 알면서도 기꺼이 친구로 맞아주듯이, 너그럽고 친절한 미소를 띤 채 천천히 내게로 다가오면서.
"안녕하세요?" --- p.27

"그 영화에서도 두 연인이 첫 데이트 때 인도식당에서 식사를 해요."
"그 영화에서도?"
그의 눈이 반짝였어요.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거죠. 아니, 일부러 그랬는지도 몰라요. 나는 그의 눈을 피해 탄두리 치킨의 발목뼈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내가 바라보고 있던 닭다리를 집어 들었어요. 그리고는 한입 베어 물고는 우물거렸죠. 뭔가 생각해야할 일이 있을 때 그는 무심코 다른 일을 하면서 시간을 버는 것 같았어요. 그게 그의 버릇일 거라고 나는 짐작했어요. 그는 신중한 사람이고, 뭐든 금방 대답하지 않는 타입이지요.
"그래서 어떻게 됐죠?" --- p.48

수많은 인파 속에서 우리는 서로 맞잡은 손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내 손을 꼭 잡은 홀리의 손의 감촉으로부터 낯선 행복감이 전해져 왔다. 나는 마치 그때까지 여자의 손이라곤 잡아본 적이 없는 사춘기 소년처럼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지난 날 내가 얼마나 고독했는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거리를 걷다가 우리는 가끔씩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상대방이 거기 그대로 있는지를 확인하곤 했다. 그리고 꿈처럼 유지되는 환상적인 현실에 안도의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 p.79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올랜도가 400년 동안 늙지 않고 남성과 여성을 경험했던 이유도 그것이고요. 성을 초월한다면 우린 자신을 초월할 수 있어요. 마치 신神처럼요. 그게 소설의 요지예요. --- p.87

버스가 정류장에서 멈추었고 우리는 서둘러 내렸다.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옛날 영화에 나오는 여배우처럼 목도리를 머리에 둘렀다. 나는 그녀의 차갑고 작은 손을 잡아 내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이윽고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그런 걸 모두 로맨스 영화에서 배웠나요?"그녀는 추워서 빨개진 코를 벌름거리며 웃었다.
"뭐든 배울 점이 있는 법이죠. 로맨스 영화에도 철학이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재미가 없어서 끝까지 볼 수가 없답니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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