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나는 내가 졸업한 덕치초등학교로 전근을 왔다. 정이 깊이 들었던 아이들을 두고 오던 날 나는 울었다. 지금도 나는 그 아이들의 얼굴이 눈에 밟힌다. 덕치초등학교로와서 나는 2학년을 맡았다. 상우 같은 놈들이다. 이 아이들을 만나고 하루가 지난 아침에 호영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선생님, 우리 할아버지가요 선생님하고 동창이래요."라고 했다. "그려, 너그 할아버지 성함이 뭣인디?" "전 아무개요." 참내, 그렇구나, 니 할아버지가 선생님하고 동창이구나. "그런데 호영아 네 아버지 성함은 뭣이냐?" "전 아무개요." "그려, 그러면 너그 아부지도 내가 가르쳤구나." "근데요 선생님, 우리 삼촌도 고모도 선생님이 가르쳤대요." 그래, 참 내가 너그 집 식구들을 다 가르치는구나. 내가 어느덧 손자들 가르치는 나이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그날 온종일 이 생각 저 생각으로 하루를 보냈다.
우리 반 은철이도 집으로 가지 못하는 아이다. 은철이뿐 아니라 시골에는 지금 집으로 가지 못하는 상우들이 참 많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외할머니와 사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모두 쓸쓸하다.
영화 <집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다. 우리와 떨어져 사는 아들과, 오랜만의 우리 부부와 영화를 같이 부러 가겠다는 딸, 이렇게 네 식구가 극장에 갔다. 넷이서 오랜만에 나란히 앉으니, 아이들의 머리통이 의자 위로 불쑥 솟아 있는 모습이 든든해 보였다.
이정향 감독이 두 번째로 만든 <집으로...>는 만들 때부터 화제가 되었던 영화다. 상우와 상우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출연자들이 현지에서 살고 있는 현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관객들의 구미를 잔뜩 당기게 했고, 피범벅을 이루는 폭력물과 잔혹물들이 화면을 거칠게 장식하고 있을 때 서정성 짙은 우리 정서를 영화화한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는 많은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디테일을 설정해놓고 관객을 그리로 몰고 가지도 않는다. 영화는 극히 일상적이다.
상우는 깊은 산골 마을인 외가십에 당분간 맡겨진다. 외할머니는 허리가 굽을 대로 굽은, 그리고 말을 못하는 사람이다. 도시에서 자란 상우가 가정 사정으로 인해 갑자기 깊은 산골 생활을 하게 되는 데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전자오락, 콜라, 초코파이, 켄터키 치킨에 익숙한 상우에게 그 깊은 산골의 생활은 그야말로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거기다가 같이 살게 된 할머니가 말까지 할 수 없다니, 환장할 일이다. 그러나 상우와 상우 할머니는 아주 사소한 일들로 점점 가까워진다. 병신이라고 벽에다가 크게 써놓았던, 할머니에 대한 상우의 태도는 하루하루 변해간다. 할머니의 바늘에 실을 꿰어주는 상우는 예쁘다. 변소가 무서워 할머니더러 그 앞에 쭈그려 앉아 있게 하는 상우는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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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날이었다. 아침부터 솜송이 같은 눈송이가 산과 산 사이를 가득 채우며 내리고 있었다. 어찌나 눈송이가 크던지, 참으로 신기했다. 나는 출근을 해야 했다. 도시락을 싸 들고 자욱한 눈 속을 나섰다. 아내는 내리는 눈을 피해 담벼락 밖으로 고개만 조금 내놓고 눈 속을 걸어 가는 나를 보고 있었다. 어디만큼 가다 뒤를 돌아보았더니, 아내는 그때까지도 그렇게 고개만 빼꼼하게 내놓고 하얀 눈송이 저쪽에서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 흰 눈 저쪽 끝 우리 집 대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내, 나에게도 아내가 있다는 게 정말 실감이 났던 것이다.
은행원 봉수(설경구 분)는 늘 쓸쓸하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갑자기 지하철이 고장이 났을 때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곧바로 휴대폰을 통해 세상 어딘가로 자기를 알린다. 마치 캄캄한 밤하늘을 떠다니는 반딧불이 같은 휴대폰 불빛은 봉수를 더욱 외롭게 한다. 휴일이 와도, 시간이 많이 남아돌아도 어디 갈 곳도, 만나야 할 사람도 없이 심심하게 지낸다. 이혼한 옛 동창을 만나 잠깐 사랑을 느껴보기도 하지만 그도 인연이 없는지 헤어지고 만다. 그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는 봉수의 은행 맞은편 학원에는 강사 원주(전도연 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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