둑스 성에서의 생활은 도처에 적들이 진을 친 것 같은 생활이었다. 시장, 의사, 집사, 요리사, 문지기 등이 모든 방법을 동원해 늙은 카사노바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래서 카사노바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그러나 진짜 적은 늙음과 외로움이었으리라. 그는 프라하, 빈, 드레스덴, 라이프치히를 여행하며 옛 친구들을 만나고, 과학자나 문인들과 소식을 교환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고 친구들을 통해 새로운 의욕을 가지려 했다.
그리고 이런 우울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카사노바는 1790년부터 자기의 인생을 회고하는『나의 인생 이야기』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과거로의 여행은 옛 사람들과 사건들을 다시 만나는 즐거움을 맛보게 했다. 뜨겁고 자신만만하게 사랑했던 여인들을 그는 회상 속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모든 걸 생생히 기억했고, 무얼 먹었는지도 확연히 추억했다.
--- p.200
“카사노바의 자유 의지와 분방한 삶은 늘 금기를 뛰어넘었어요. 마치 선동가 같지 않나요? 이런 선동가가 많을 때 우리는 시대가 변하고 있다고 말하지요.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카사노바를 ‘친밀성의 혁명가’라고 평가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소. 카사노바는 중세 내내 집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던 여자들의 성과 사랑을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며, 또한 그는 내적인 사랑의 감정을 언어화했고, 모든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그들을 재산이나 소모품이 아닌 진정한 파트너이자 인간으로 대했다는 것이에요. 인간이 근대에 와서야 이성과 감정을 지닌 주체로서 ‘개인’을 발견했다고 할 때, 카사노바는 바로 그 근대적 인간의 출발선에 있었고 주변 여자들 역시 그를 통해 근대적 인간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는 게 앤서니의 평가였소.”
--- pp.156~157
앙리에트와의 사랑은 카사노바에게 가장 아름답고 고결한 사랑이었다. 훗날 앙리에트는 편지에 고백했다.
“당신을 버려야만 했던 건 제 자신입니다. 나에 대한 생각으로 슬퍼하지 마세요. 우리가 나누었던 즐거운 꿈을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을 불평하지 않았고, 서로 함께 한 3개월 동안만은 완벽하게 행복했다는 걸, 그토록 아름다운 꿈이 그렇게 지속된 적은 없었다는 걸 자랑스러워해요. 앞으로 다가올 내 인생에 더 이상의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다시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 pp.116~117
“그는 언제나 자유를 즐겼고 그의 생각은 늘 앞서갔으며 다방면에 수완을 발휘해 열심히 살았습니다. 만일 여자나 농락하고 남의 돈이나 사취했다면 오늘날 카사노비스트들은 없을 것입니다. 카사노바는 지적인 작가이면서 경제통이었고 정치적 로비스트였으며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으며 사람들과 교제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남긴 업적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온 유럽을 떠돌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으니 고달픈 인생이었겠죠?”
“파란만장했다는 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성향 때문이고, 솔직하고 직설적이고 즉흥적인 판단과 말 때문에 늘 손해를 본 사람이긴 했습니다. 고국 베네치아에서 추방당하기도 했구요. 무슨 일에 열중하든 늘 여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사람이니 고달프다기보다는 즐겁고 행복했겠죠.”
“저는 한국의 카사노비스트입니다.”
“하하. 당신이 자유롭고 이 순간에도 사랑에 취해 있다면 믿겠습니다. 게다가 박식하다면 말입니다.”
--- pp.88~89
아름다운 베네치아. 내가 이곳으로 와서 누굴 만나려 했던가. 오래 전 낡은 책 속에서 만난 남자 카사노바가 어디서 나를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짐을 풀고 매무시를 가다듬고서 나는 그를 만나러 나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난감했다. 200년의 시공을 넘어 우리는 과연 그를 만날 수 있을까.
난 어디든 갈 것이다. 찾아간 그곳에 그가 없으면 지나간 흔적 속에서 상상의 동거를 할 것이다. 카사노바, 그가 어디서 나를 놀라게 해줄지는 알 수 없다. 만일 지구 반대편에서 온 한국인이 자신의 생애와 흔적을 열심히 좇아간다면 그는 결국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 혹은 스스로 감동하여 존재를 드러내며 목멘 소리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난 억울하오. 후세 사람들이 나를 뭐라 하는지 다 들었소. 당신은 내 하소연을 들어준 유일한 사람이구려.’
--- pp.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