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가 날아 앉은 은비녀에 석류 총총 금박댕기, 임과 나눠 가질 쌍가락지에 사뿐사뿐 외씨버선, 과연 이런 것에 한 마음이 뺏길쏘냐.”
타령처럼 들리는 예호랑의 말투에 은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 미소를 보자 예호랑의 얼굴도 풀어졌다.
“저라면 뺏기겠습니다.”
장터에 멈춰선 은별이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정말?”
“나비가 날아 앉은 은비녀에 석류 총총 금박댕기에, 임과 나눠 가질 쌍가락지에, 그리고 사뿐사뿐 외씨버선에 그 마음을 뺏기겠습니다.”
눈을 감고 속살대는 은별의 얼굴을 예호랑이 유심히 바라봤다. 조청빛깔 눈을 감자, 살굿빛으로 익은 입술이 도드라졌다. 그 말랑한 입술로 뭔가를 말할 때마다 작고 하얀 이가 언뜻언뜻 드러나는 것이 팥죽에 들어간 새알 같기도 하고, 막 꼬투리를 벗어난 어린 콩 같기도 하여 확 달려들어 깨물고 싶다.
예호랑이 두 주먹을 꼭 쥐고 은별을 내려다봤다.
“어째서……?”
“아무도 품고 있지 않은 텅 빈 마음이라면, 그런 것들이라도 받아야 채워지지 않겠습니까.”
더는 참지 못하고 은별의 어깨를 움켜잡는 예호랑. 점차 말랑한 입술이 가까워진다.
“하지만 누군가를 사모하는 감정으로 꽉 들어찬 가슴이라면 구중궁궐을 지어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은별이 스르륵 눈을 뜨고 예호랑을 올려다봤다. 아슬하게 입술이 닿으려는 찰라, 예호랑이 멈춰 섰다. 주술에서 깨어난 듯 화들짝 놀라 은별에게서 떨어졌다. 모든 게 챙이 좁은 흑립 탓인
것처럼 공연히 끈을 고쳐 매는 예호랑. 그사이 은별은 태연하게 댕기를 골랐다. ---「무명 치마에 감물 배듯」 중에서
얼룩빼기 말이 코를 처박고 물을 마시는 동안 선비는 신을 신은 채 물에 들어섰다. 망설임 없이 다리 밑으로 향하는 선비. 분홍빛이 허공에서 나부낀다.
“이름이 무어냐.”
선비가 허공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답 대신 외마디 비명이 들리더니 다리에 매달려 있던 은별이 털썩 선비의 품으로 떨어졌다. 선비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천변에 주저앉았다.
“월아요.”
은별이 후다닥 선비의 품에서 벗어나며 이름을 내뱉었다. 도망치려는 은별의 손목을 낚아채는 선비. 그 덕에 은별도 천변에 엎어졌다.
“그럼, 난 유리겠구나?”
선비는 천변에 엉덩이를 담그고 앉아 느긋하게 물었다.
“선비님은 유리가 아니에요.”
물이 뚝뚝 흐르는 갓을 고쳐 매며 은별이 사납게 대꾸했다.
“그럼, 너도 월아가 아니다.”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선 은별, 이름을 얘기할 기색이 아니다.
“내 이름을 기억하느냐?”
“공유.”
선비의 곧은 눈썹이 활처럼 휘어졌다. 선비가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어째서 도망을 간 것이냐?”
“이미 말 도둑으로 낙인이 찍혔는데, 다시 만난들 좋을 게 없잖아요.”
느물느물 웃는 선비가 얄미워 퉁명스레 대꾸했다.
“말 도둑치고는 자태가 곱지 않느냐. 그래, 마치 남장을 한 월아처럼.”
정곡을 찌른 공유의 말에 은별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어설프게 그를 속이려 했던가. 다리에서 떨어지는 몸을 받아 든 순간, 눈치 챘으리. 아니, 그라면 기방의 문을 걷어찬 순간부터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심중을 꿰뚫는 예리한 눈. 은별은 살풋 벌어진 옷깃을 다급하게 여몄다.
“자태가 고운 걸로 치자면 선비님도 마찬가지거든요. 치마만 두르면 딱 기생이구만.”
저리 사내다운 기생이 어디 있겠냐만은 공연히 억지를 부리며 창옷 자락을 쥐어짜는 은별이다. 후두둑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은별의 억지를 귓등으로 흘리며 그가 웃었다. 사내다운 묵직한 웃음소리가 물살을 따라 흘러갔다.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 만이었던가. 호롱을 밝힌 가마를 쫓던 그날부터 웃는 걸 잊었다. 감히 바라보아선 안 되는 그것을 향해 내달리는 순간부터 웃는 법을 잊었다.
반가운 얼굴을 알아본 말이 뭍으로 나서는 은별을 향해 다가갔다. 젖은 손으로 말의 목덜미를 긁어주는 은별. 말이 만족스럽게 울어댔다.
“하긴 한 번 말 도둑이 두 번 말 도둑 되지 말란 법은 없죠.”
은별은 훌쩍 말 등에 올라타서는 개구지게 웃었다.
“돌려주러 와야 할 텐데?”
“스스로 집을 찾아가는 말을 왜요?”
은별이 되바라지게 대꾸하고는 말 머리를 돌렸다. 천변에 홀로 남겨진 선비가 헛웃음을 지으며 명아주 지팡이를 주워 들었다.
“그 말은 한 번 갔던 곳은 결코 잊지 않는다.”
불빛이 휘황한 명월관 앞에서 은별이 멈춰 섰다.
“이쯤이면 되었다. 넌 똑똑하니까 혼자서 돌아갈 수 있지?”
말의 목을 다시 한 번 쓰다듬는 은별은 아쉬운 듯 말을 떠나보냈다. 말도 아쉬운지 가던 길을 멈추고 자꾸 뒤돌아봤다.
터덜터덜 걷던 은별은 모퉁이에서 휘날리는 남보랏빛 옷자락을 발견했다. 갓이 흘러내린 것도 모르는지 맨상투 차림의 이지가 바람처럼 달려와 은별을 와락 끌어안았다.
“걱정했다!”
우악스런 손에 잡혀갔을까, 창도 없는 감옥에 갇혔을까, 그 고운 얼굴에 눈물이 맺힐까, 걱정했다. 차마 입으로 내지 못한 말들이 마음 언저리에서 피 묻은 돌멩이처럼 쌓여갔다.
“천변에 빠진 것뿐이에요.”
은별을 끌어안은 이지의 옷에도 물기가 스며들었다.
“옷 젖어요.”
“상관없다.”
낯익은 기척에 명월관 대문을 나서던 애월이 이지의 품에 안겨 있는 은별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누군들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저리 고운 빛이니.” ---「산비탈에 도토리 굴러가듯」 중에서
예닐곱 살 먹은 여자아이가 살금살금 다가와 은별을 향해 무언가 쑥 내밀었다. 곶감이다.
“아껴놨던 건데 주는 거야.”
“왜 날 줘?”
“쥔님이잖아.”
“쥔님이면 주는 거야?”
“아니, 슬퍼보여서 주는 거야.”
“이거 먹으면 안 슬퍼?”
“응, 먹는 동안엔. 근데 다 먹고 나면 다시 슬퍼져.”
“그럼, 어쩌지?”
은별이 낄낄 웃으며 물었다.
“뭘 어째? 나처럼 아껴 먹으면 되지. 오래오래 아껴 먹으면 될 거 아냐.”
“우문현답이다.”
은별이 곶감을 반으로 뚝 쪼개 아이에게 건넸다.
“갑자기 안 슬퍼졌어. 그러니까 반쪽 줄게.”
---「목화가 툭 벌어지듯」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