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 많은 글이 그리 쉬울 리는 없다. 그래서 나는 대체로 쉬운 글을 믿지 않는다. 그런 글들은 쉽지만 안으로 닫혀 있고 밖으로 열려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책 한 권을 읽고 자족하게 되는 글은 완전해 보이지만 그 닫힌 구조와 주장은 대개 유치하고 외곬이기 쉽다. 짜릿하지만 깊이가 없고 자극적이지만 속이 공허한 대개의 베스트셀러가 좋은 책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난 주가 없는 닫힌 구조에서 찾는다. …… 즉 그 자체만으로 완벽한 책보다는 한 권을 읽고 나면 다시 또 다른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책이 좋은 책이다. 그건 그 책이 가진 함량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풍성한 함의와 수많은 서브텍스트(sub-text)들을 담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 pp. 72∼73
그 전까지 나는 주(註)란 본문에 대한 출전이나 근거를 밝히는 해설 정도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는 다시 다른 책으로 인도하는 길이자 방향등이었다. 어떤 때는 책 한 권 전체가 통째로 다른 책에 대한 주가 되기도 했다. 즉 진정한 주란 한편으로 본문에 대한 주이면서 다시 다른 책으로의 방향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주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나에게 독서의 기본은 '주'가 되었다. 주가 되는 책이 좋은 책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생각, 내가 좋아하는 책의 주를 따라가면 된다는 생각, 그렇게 지금까지도 좋은 책을 가르는 나의 기준은 '주'가 되는 책이다. 그러다가 가끔 그 '주'가 도돌이표나 돌림노래처럼 어느 곳에서 서로 만나게 되면 난 내가 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내 속에 무언가 하나의 굳건한 체계가 만들어져 가고 있다는 증거를 찾은 셈이니까.
--- pp. 71∼72
전작주의는 특정 작가에 대한 추종이나 맹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누군가에 대한 단순한 모방이나 추종이 아니라 '해석'이다. 그리고 그 전제는 그들의 전작이 당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대의 현실을 무시한 채 한 사람의 글과 삶을 무작정 추종한다면 그것은 과거 지향적인 보수주의에 다름 아닐 것이다. …… 그렇다고 현명한 이들이 선택한 결론만 보자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해답은 그 결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론은 '그들의' 답일 뿐이다.) 그들이 지나온 과정에 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어떻게 세상과 맞섰고 그때마다 어떤 당대적인 해답을 얻어 갔는지 배우는 것이 다시 현재의 세상을 견디고 미래로 건너가는 방법을 배우는 길이 될 것이다. 그것이 전작주의의 방법론이다.
--- pp. 35∼36
전작주의란, '한 작가의 모든 작품(全作)을 통해 일관되게 흐르는 흐름은 물론 심지어 작가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징후적인 흐름까지 짚어 내면서 총체적인 작품세계에 대한 통시/공시적 분석을 통해 그 작가와 그의 작품세계가 당대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찾아내고 그러한 작가의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일정한 시선'을 의미한다. …… 사전적 의미에 비추어 본다면 특정하게 누군가의 작품이나 작품세계를 지정하지 않고 무작정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어 낸다는 지향만으로 전작'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특정 작품을 통해서가 아니라 한 작가의 전작에 흐르는 일관된 흐름을 읽어 내려는 일정한 시선을, 통일된 세계관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원칙적 지향점을 지닌 하나의 방법론으로 볼 수는 있을 것이다.
--- pp. 24∼25
대학시절 나를 매혹시킨 글들은 본문보다 긴 주가 달린 글이었다. 촘촘한 글씨로 본문보다 갑절은 긴 주 주는 낯설긴 했지만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각 주장과 노선이 난무하고 무지는 주장이 될 수 없다는 명제가 가슴에 와 닿던 시절 본문보다 긴 주는 내게 터무니없는 주장과 올바른 주장을 판단하는 근거이자 내가 믿는 주장의 명쾌한 증거가 되어 주곤 했다. 더구나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어느 책의 몇 pp를 보라'는 식의 명령문과 늘 사용하는 '우리'라는대명사는 내겐 거부할 수 없는 믿음의 주/객관적 근거가 되었다.
그 글들의 주를 따라 다른 책으로 가면 또 다른 주가 나오고, 그 주를 따라가면 다시 다른 주를 만나고, 그런 식으로 나는 정말 난생 처음으로 스스로 사슬처럼 이어진 '내 공부'를 해 나갔다. 말 그대로 주를 따라 하나의 생각의 체계, 작은 '사상'을 만들어 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 내겐 따로 스승이나 선배가 없었다. 학과 수업은 따분하기만 해 재미가 없었고, 학회나 동아리에서 진행되는 세미나는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학교 전체가 하나의 방향, 하나의 사상으로만 향하고 있었는데 완결된 사상을 담았다고 하는 그 책들에는 공교롭게도 주가 없었다. 나는 혼자서 공부할 수 밖에 없었고 내가 혼자서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란 책을 읽는 것뿐이었는데 다행히도 내가 믿고 동의하는 사람들의 책엔 본문보다 더 긴 주가 달려 있었다. 하나의 짧은 논문을 읽으려면 참고문헌이나 참고논문이 적어도 열 개 이상은 족히 되었고 그 책들을 다 살 수 없어 도서관에서 빌리거나 학교 앞 사회과학서점에서 새책을 빌려서 해당 부분을 복사해서 보곤 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긴 주가 달린 글을 쓰던 사람들의 책은 새로 나오기만 하면 바로 구입해서 읽었고 책이 조금 늦어지기라도 하면 조바심을 내면서 기다렸다. 내가 몇 달 동안 혼자서 궁금해하고 고민했던 문제들의 답은 신기하게도 그 책들 속에, 마치 내 질문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담겨 있었다. 그렇게 사람만이 아니라 책이 내게 스승이나 선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된 것이다.
그 전까지 나는 주란 본문에 대한 출전이나 근거를 밝히는 해설 정도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는 다시 다른 책으로 인도하는 길이자 방향등이었다. 어떤 때는 책 한 권 자체가 통째로 다른 책에 대한 주가 되기도 했다. 즉 진정한 주란 한편으로 본문에 대한 주이면서 다시 다른 책으로의 방향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주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나에게 독서의 기본은 '주'가 되었다. 주가 되는 책이 좋은 책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생각, 내가 좋아하는 책의 주를 따라가면 된다는 생각, 그렇게 지금까지도 좋은 책을 가르는 나의 기준은 '주'가 되는 책이다. 그러다가 가끔 그 '주'가 도돌이표나 돌림노래처럼 어느 곳에서 서로 만나게 되면 난 내가 잘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내 속에 무언가 하나의 굳건한 체계가 만들어져 가고 있다는 증거를 찾은 셈이니까.
--- pp. 70∼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