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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우리옷 변천사

역사속의 우리옷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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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1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22쪽 | 554g | 185*235*20mm
ISBN13 9788975987229
ISBN10 8975987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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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삼국시대 복식

1. 사회문화적 배경

삼국시대는 대외적으로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시기이다. 고대 국가체제를 정비한 삼국은 상호간에 전쟁을 벌이는 한편 타국과의 문화와 문물교류에 의해 영역을 확대해 갔다. 또한 중국의 한, 남북조, 수, 당으로 이어지는 여러 나라와 활발히 교류하고 그 침략에 맞서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형성된 삼국시대의 복식은 삼국시대에 이르러 원형이 정착되고 형성되었다기 보다 고조선 이전 부족국가 성립기부터 우리 민족과 함께 발전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농경과 청동기문화에 바탕을 두고 성립된 최초의 고대국가였던 고조선시대부터 우리의 복식은 기본형을 갖추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에 삼국보다 강대국이었던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거나 그대로 차용하였다기 보다는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복식이 왕조가 바뀌더라도 쉽게 변화하거나 변형되지 않으며, 외래적 요인이 가미된다 하더라도 기본구조가 그대로 유지되는 특성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삼국시대 이전 사료에서 복식에 관한 부분은 매우 단편적이거나 기술적이며, 이를 보완할 만한 유물자료의 발굴은 더욱더 미비하다. 또한 중국 역사서는 중화중심주의에 의해 주변국들에 대한 내용에 공정하지 못한 부분이 많아 비평적이고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따라서 삼국시대 이전 복식에 대한 접근은 사료분석의 공정성을 유지하면서, 주변국의 정치, 사회, 문화적 환경, 중국에 편입되지 않았던 소수민족에 대한 자료검토와 삼국과의 교류상황 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삼국시대 이전 복식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동사강목(東史綱目)』 기자조선(箕子朝鮮)에 ‘단군이 백성에게 편발과 개수(蓋首)를 가르쳤으며, 군신, 남녀, 음식, 거처의 제도가 이때에 비롯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에서는 ‘의복은 청결하며, 머리는 길게 자른다. 이들은 광폭세포를 짜서 입는데, 법속은 특히 엄준하다.’라고 하였으며, 부여 복식에 관해서는 ‘흰옷 입기를 좋아하며, 소매가 크고 넓은 흰색의 포를 착용하고 가죽신과 바지를 입었다.’고 기술하였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서는 ‘사람들의 형체는 모두 키가 크고 몸이 장대하며, 미발에 의복이 청결하다. 그러나 형법은 매우 엄중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서(晋書)』 동이전(東夷傳) 마한(馬韓)에서는 ‘영주(纓珠)를 귀히 여겨 옷에 매달거나 머리를 장식하고 귀로 늘어뜨린다’고 하였고,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서는 ‘은(殷)의 도가 쇠퇴하자 기자는 조선으로 갔고, 예의를 그 백성에게 가르치고, 누에를 치며 옷감을 짰다.’고 하였다. 이에 삼국시대 이전 우리 민족은 양잠에 의해 견직물과 광폭세포를 만들고, 흰옷을 좋아하여 의복이 청결하며, 바지를 입고, 미발에 머리장식과 가죽신을 신는 복식의 기본구조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 중 가정 먼저 강성하였던 고구려(BC37~669)는 일찍부터 주변소국들을 정복하고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한 고대국가 체제를 확립하였다. 5세기 초에 광대한 영토를 가진 대국이 된 고구려는 삼국 간의 각축에서도 주도권을 쥐고 남북조의 여러 나라와 다각적인 외교를 펼치면서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였고, 소수림왕 372년에 수용된 불교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이를 백제와 신라 및 일본까지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백제(BC18~660)는 청동기시대 이후 북방에서 내려온 이주민이 세운 삼한의 하나인 마한 소국 가운데 시작되었으며, 한반도 중서부의 요지에 자리잡고 세력을 확장하였다. 백제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바다 건너 중국의 여러 지역 및 일본과도 활발한 교류를 하였으며, 온화한 기후와 평야지대의 풍요로운 물질문화를 바탕으로 화려하고 세련된 복식문화를 이루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BC57~676)는 진한의 소국 가운데에서 발전한 국가로 여러 집단이 연합하여 나라를 형성하였다. 동해안과 낙동강 유역의 소국들을 정복하여 발전한 신라는 골품제라는 신분제도로 지배층의 권위를 보장하였고, 국가의 중대사는 화백에서 결정하였다. 진흥왕대의 활발한 정복사업에 의해 국토를 크게 확대한 신라는 낙동강 유역과 한강 하류지역까지 확보하고, 삼국 간의 각축에서도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복식은 삼국이 지리적으로 인접하여 외부문물의 유입경로가 비슷하고, 유사한 자연환경과 풍토, 공유문화가 광범위하여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특히 『북사(北史)』 열전(列傳) 신라(新羅)에서는 ‘풍속, 형정, 의복은 대략, 고려, 백제와 비슷하다’고 하여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외부인의 눈에 의한 대략적인 것이어서 완전하게 받아들이는데 한계가 있지만, 삼국의 복식이 유사성을 바탕으로 하여 독자적인 특성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삼국시대 복식의 기본형은 유(肆;저고리), 고(袴;바지)와 상(裳;치마), 포(袍;겉옷)를 중심으로 하여 여기에 관모(冠帽), 대(帶), 화(靴) 또는 이(履)가 첨가된 형태이다. 이러한 구조는 북방 호복(胡服)계통의 의복으로 유목민이 말을 타거나 이동 중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소매폭이 좁은 저고리와 품이 좁은 바지를 기본으로 한다. 특히 호복이라는 명칭은 중국 전국시대 조(趙) 무령왕(武寧王)이 호복령을 내려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기록에 의한 것으로, 중국을 비롯한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던 스키타이계 복식을 나타내는 말이다. 스키타이는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의 『역사(historiai)』에 처음 등장하는데 비(非)그리스인을 뜻하며, 기원전 7~8세기에 걸쳐 흑해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유목 기마민족을 지칭한다. 스키타이계 문화는 스키타이인들이 북방 유라시아 스텝지대를 지나는 초원의 길을 통해 전파하였던 그들의 문화를 일컫는 말이며, 남시베리아, 몽고고원을 지나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 복식은 이러한 호복계통의 복식을 기본구조로 하여 신분과 계층, 의례적 의미와 기능성, 미의식이 반영되면서 이식(耳飾;귀고리), 경식(頸飾;목걸이), 완식(脘飾;팔찌), 지환(指環;반지)을 갖춘 완전한 모습을 정착시키게 되었다.

2. 고구려시대 복식

1) 고구려 고분벽화의 복식사적 의의
고구려는 BC37~AD669년간 존속하면서 국내성과 평양성으로의 천도(遷都)를 행하였다. 이는 수도의 인근지역에 역대왕과 주요 세력가들의 고분을 축조하는 통념에 따라 고구려의 수도였던 통구지역(환인, 국내성)과 천도 후 평양지역(평양성)을 중심으로 한 많은 고분을 남기게 하였고, 각 지역의 무덤은 천도가 행해졌던 당시대의 상황에 따라 고분의 축조형태나 내부구조 등 성격을 달리하였다. 특히 고분의 축조시기는 벽화의 내용 및 형식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 것으로, 학자들마다 견해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4세기에서 6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에 고구려 고분벽화는 4세기에는 생활풍속 및 인물도가 그려졌고, 5세기 장수왕대가 되면 생활풍속 그림이 주요 내용으로 부상하면서 인물도는 약화되고 사신도(四神圖)가 서서히 출현하다가, 6세기 후반이 되면 사신도로 고정되는 경향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벽화고분은 통구지역 24기, 평양지역 69기로 평양지역에서 주로 살펴볼 수 있으며, 이 중 생활풍속 및 인물도를 볼 수 있는 고분 42기 중 고구려 복식의 양식을 살필 수 있는 고분벽화는 4세기에서 5세기에 축조된 고분에서 주로 살펴볼 수 있다.
이렇듯 고분벽화의 편년과 내용에 대한 체계가 구체화된 것은 1949년 안악3호분의 발굴을 시작으로 본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안악3호분 벽화는 고분에서 발견된 묵서(墨書)의 표기년대(357)에 대한 해석에 따라 주인공이 전연(前燕)에서 망명한 동수(冬壽)라는 설과 고구려의 왕이라는 설(왕릉설은 다시 미천왕설과 고국원왕설로 나뉘어 있다.)이 팽팽하게 맞서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주인공 논의는 안악3호분에 보이는 복식이 고구려 궁중양식인지 외래양식인지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벽면에 나타나고 있는 인물들은 그 당시 고구려인들이 지니고 있는 사상과 감정표현을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는 삼국시대 살았던 그들의 종교관과 의식주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각적 자료로서 복식의 종류와 형태를 제시해 주는 중요한 한국복식사적 의미를 지닌다.
이와같이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복식은 한국 고대복식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삼국시대 복식 원형과 제도를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자료라는 점에서 가치를 갖고 있다. 특히 당시의 고구려가 한국의 어떤 왕조보다 중국과의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고구려의 고유양식을 충분이 간직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시각에서 고구려시대 복식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2) 남자의 옷
(1) 유(肆)
유(肆)는 저고리를 뜻하며, 길이가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형태로 깃은 모두 곧은 깃(直領)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저고리는 거의 같은 형태이며, 기본형태에 있어서는 남녀가 서로 비슷하고 선에서 차이가 있었다.
고구려의 고유양식인 곧은 깃은 유(肆)나 포(袍)의 목부분을 감싸고 앞으로 내려와 옷을 여미는 부분으로 직선형태로 되어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무용총, 쌍영총, 수산리 고분벽화에서 직령의 깃을 볼 수 있으며, 가선을 덧대어 문양과 색상을 달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을 덧대는 양식인 가선은 유(肆)나 포(袍)의 깃, 섶, 도련, 소매끝, 치마의 하단, 바지의 밑단에 다른 튼재의 천을 덧대어 붙인 것을 말한다. 이렇게 선을 덧대는 방식은 장식의 의미, 주술적 의미, 구성상의 의미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장식의 의미는 단조로운 형태의 복식에 색과 문양이 다른 선을 더함으로써 수식의 역할을 하였으며, 가선의 색과 문양에 따라 신분을 구별하기도 하였다. 또한 주술적 의미로는 특수한 색상이나 문양을 덧붙여 의복을 착용한 사람에게 질병과 재해가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믿음에 따른 것으로 가선을 하는 것을 말한다. 구성상의 의미는 의복의 끝부분이 활동에 따라 잘 마모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재료를 덧대어 구성을 견고하게 하였던 것이다.
옷을 여미는 방법에 있어서는 좌임과 우임이 나타나고 있으나, 고구려 고분벽화 인물도를 통해 좌임(左橓)이 더 많음을 확인할 수 있다. 좌임은 오른쪽 옷자락이 왼쪽 위로 올라와 왼쪽으로 여며지는 형태로 우임(右橓)의 반대말이다. 4세기 이전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좌임이 주로 나타나 고구려의 여밈은 좌임이 우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임은 좌임에 비해 빈도가 적게 나타나며, 357년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안악3호분에서부터 볼 수 있다. 이후 좌임과 우임은 어느 정도 혼용기를 거쳐 우임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유(肆)의 소매는 몸에 꼭 맞는 형태인 착수(窄袖)가 기본형으로 착용되었다. 착수는 소매통이 넓다는 의미의 통수(筒袖)나 대수(大袖)와 상반된 말로, 기마민족의 활동성과 보온성을 감안한 형태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고 있는 유(肆)의 특성은 길이가 엉덩이까지 내려오며, 직령의 깃으로 여밈을 하였다. 소매는 가선을 댄 형태를 기본복식으로 하였다. 다만, 소매의 길이와 너비, 가선의 문양과 색, 옷감에 따라 신분의 구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좌임이었던 여밈방식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우임으로 변화되었다.

(2) 고(袴)
바지에 관한 기록에는 태구고(太口袴), 대구고(大口袴), 궁고(窮袴), 세고(細袴), 곤(壘) 등이 있는데, 고(袴)는 바지를 뜻하며, 남녀 모두가 착용하였던 기본복식이다. 바지는 말을 타기에 적합하고, 추위를 막기에 유용하여 모든 계층에서 폭넓게 사용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태구고와 대구고는 폭이 넓고 길이가 긴 형태로 상류계층에서 착용하였던 바지이며, 궁고와 세고는 폭이 좁아 활동적이고 실용적인 바지형태를 말한다. 또한 곤은 바지 길이가 매우 짧은 형태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씨름하는 사람, 장사(壯士), 역사(力士) 등과 같이 하류계층의 사람들이 착용했다. 바지의 색은 자색, 적색, 적황색, 흑색, 소색, 황갈색, 점무늬 등 다양하며, 밑단에 선을 댄 형태가 많다.

(3) 포(袍)
포(袍)는 유(肆) 위에 입은 겉옷으로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계층에서 착용하였다. 유(肆)와 마찬가지로 직령 깃에 도련, 소매끝이 가선되어 있으며, 좌임이 주류를 이룬다. 여밈은 대를 이용하여 매었으며, 직령교임형(直領交橓形)의 형태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살펴보면, 안악3호분의 주인공은 대수자포(大袖紫袍)를 착용하였고, 쌍영총에서도 대수포(大袖袍)를 입고 있어 상류계층에서는 소매가 넓고, 길이가 긴 포를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반면, 하류계층에서는 소매가 좁고, 길이가 비교적 짧은 포를 입었다. 포는 방한과 의례를 위해 모든 계층의 복식으로 착용되었다.

(4) 대(帶)
대(帶)는 유(肆)나 포(袍)를 여밀 때 사용하는 실용적인 측면과 신분을 표시하고 의례를 행할 때 착용하는 의례적인 측면에서 사용되었다.
대의 종류에는 천으로 만들어진 포백대(布帛帶), 가죽으로 만들어진 피혁대(皮革帶), 금속으로 만들어진 과대(島帶)가 있다.
포백대는 주로 견직물로 만들어졌으며, 의복을 여미기 위한 실용적 측면에서 사용되었다. 신분에 따라 대의 너비와 색을 달리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피혁대는 가죽으로 만들어 포백대보다 견고하였으며, 사냥이나 전쟁시 칼이나 활 등 무기를 휴대하기에 실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고분벽화 수렵도에서 착용한 것으로 보이며, 백위대(白韋帶), 백피소대(白皮小帶), 소피대(素皮帶) 등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5) 화(靴)·이(履)
화(靴)는 삼국시대에 착용되었던 신발로 신목이 올라온 형태이며, 이(履)는 신목이 낮은 형태이다.
화는 방한(防寒)에 적합하며, 유목민이나 기마민족과 같이 북방계통의 신발로 추정된다. 기록에 의하면, 적피화(赤皮靴), 오피화(烏皮靴), 말화(入靴)가 있으며, 주로 가죽으로 만들어 붉은색과 검은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쌍영총, 무용총 벽화에서 살필 수 있다.
이는 비교적 따뜻한 남방계통의 신발로, 『후한서』에 초리(草履), 『진서』에 초교(草裂), 『북사』에 황혁리(黃革履), 『구당서(舊唐書)』에 황위리(黃韋履)를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풀과 가죽으로 만들어졌으며, 가죽으로는 황색 이가 착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용총에서 살필 수 있다.
그밖에 금동리(金銅履)는 코가 뾰족하고 바닥에 스파이크가 박힌 형태로 통구 12호묘, 길림성 집안현에서 출토되었다. 또한 삼실총 무인(武人)도에서 금동리를 신고 있어, 금동리가 부장품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 착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3) 여자의 옷
(1) 상(裳)·군(裙)
상과 군은 주로 여성이 착용하였던 치마를 이르는 말로, 상이 일반 치마를 가르키는 것이라면 군은 상보다 폭을 더해 훨씬 풍성하고 의례적인 치마를 말한다. 형태는 저고리의 길이가 길었던 만큼 허리에서 착용하여 땅에 닿을 만큼 길었으며, 잔주름을 잡은 형태, 장식선을 단 형태, 색동치마와 같은 형태 등 다양한 양식을 볼 수 있다. 특히 수산리 벽화고분에서 볼 수 있는 색동치마는 중국의 당(唐)대 복식과 일본의 고송총(高松塚) 벽화고분에서 비슷한 유형을 살필 수 있어 중국과 고구려, 일본의 복식양식이 교류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상과 군이 언제부터 여자 전용복식으로 정착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승려복식에서 포 밑에 치마형태의 복식을 착용한 것외에 남자복식의 예를 살필 수 없어 삼국시대에는 이미 여자복식으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고(袴)
삼국시대에는 남녀모두 바지를 착용하였으며,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무용총 시녀가 착용한 바지는 폭이 좁고 밑단에 가선을 더한 형태이며, 무용도에서는 상(裳) 아래 바지를 받쳐 입은 모습을 볼 수 있다.
바지는 저고리와 함께 남녀모두 기본복식으로 착용되었으나, 상류계층에서는 치마를 받쳐 입는 속바지로서 주로 사용하였고, 무용총 시녀처럼 하류계층에서는 실용성과 활동성을 위해 치마를 짧게 입어 바지가 보인다. 또한 남자복식의 바지와 같이 상류계층 일수록 폭이 넓고 길이가 긴 관고(寬袴)를 입고, 하류계층에서는 세고(細袴)를 착용하여 신분과 계급에 따라 차이를 두었다.

4) 관모와 두식
(1) 관모
관모는 자연환경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고 관리하는 실용적 차원에서 발생하여 신분을 구별하고 의례를 수행하는 등 다양한 역할과 기능이 부여되면서 변천을 거듭하였다. 특히 남성의 관모는 고대국가에서 남성 위주의 계급사회를 이루었던 까닭에 매우 복잡하고 다채롭게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모습은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의 관모는 머리를 간편하게 수발하기 위한 건(巾)에서 발전하여, 자연의 햇빛과 비, 눈 등을 피하면서 머리에 착용할 수 있는 모(帽)로 변모하고, 사회적 의미가 부여된 관(冠)으로 발전하였다. 즉, 관모는 관(冠)과 모(帽)가 합하여진 형태로 머리에 착용하면서 신분과 계급을 드러내는 복합적인 의미이며, 변(弁), 절풍(折風), 책(憎), 나관(羅冠), 건귁(巾巾國), 건(巾), 입(笠) 등이 있다.

① 변(弁)
변은 삼각형의 모습을 하며 관모의 가장 원시적 형태이다. 『석명(釋名)』에 ‘변은 두 손을 서로 마주칠 때와 같은 모습’이라고 하여 불가의 승려들이 쓰는 고깔과 유사할 것으로 보이며, 『후한서』의 기록에서 우리 민족이 변을 썼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변은 직물 뿐만 아니라 피혁 등으로 만들어졌고, 절풍의 모체가 된 관모이다.

② 절풍(折風)
절풍은 『삼국지』에서 ‘변과 같은 형태’라고 기록되어 있다. 절풍은 변(弁)에서 발전하여 삼각형의 모양을 유지한 속부분과 이를 받쳐 고정하는 겉부분으로 이루어진 양식, 양쪽 귀가 나온 사각형 양식으로 나뉘어진다. 절풍의 착용모습은 각저총, 삼실총, 무용총, 장천1호분, 대안리1호분 등에서 볼 수 있으며,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계층에서 착용하였다. 또한 상류계층의 절풍을 소골(蘇骨) 또는 골소(骨蘇)라고 하였으며, 절풍은 양쪽의 끈으로 턱 아래에서 묶어 고정하기도 하였다.
또한 절풍에는 새 깃이나 술을 꽂아 장식하였는데, 조우(鳥羽)를 삽식하였다고 하여 조우관(鳥羽冠)이라고 한다. 조우관은 절풍에 새 깃을 꽂아 신분을 구별하고 귀천을 나누는 역할을 하였다.

③ 책(巾責)
책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머리에 건(巾)이 있는데, 이를 책(巾責)이라고 한다’고 하여 건을 매는 형태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책은 앞 모정(帽頂)이 낮고, 뒤부분에 삼각형 수식이 붙어 있는 형태이다. 책은 상류계층에서 착용한 관모로 기록되어 있지만,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의장기수를 비롯한 다양한 계층에서 착용하고 있다.
수산리 벽화와 안악3호분 등에서 볼 수 있는 책은 뒷부분이 삼각형으로 올라가 있는 형태, 뒷부분이 두 갈래로 나뉘어진 형태 등 여러 가지 모습을 보인다.
고구려의 책은 중국에서 들여온 관모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나, 『삼국지』에서는 고구려의 책이 ‘무후(無後)’라 하여 중국의 책 뒤에 장식으로 늘어뜨리는 수(收)가 없는 점, 책의 세부적인 형태가 다르다.
④ 나관
나관은 비단으로 만든 관모를 뜻한다. 안악3호분, 덕흥리고분 등에서 묘주가 나관을 착용하고 있으며, 상류계층이나 최고지배자가 착용했던 관모로 보인다. 『구당서』에서는 ‘왕만이 오채(五綵)로 된 옷을 입고 흰색 나(羅)로 만든 관을 썼으며, 금으로 장식하였다’고 하였으며, 『신당서(新唐書)』에서는 ‘대신은 청색 나로 만든 관을 쓰고 그 다음은 진홍색 나로 만든 관을 쓰는데, 두 개의 새 깃을 꽂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나관은 내관과 외관으로 구분되며, 안악3호분의 묘주는 검정색의 책 위에 흰색 나관을 덧쓰고 있는 모습이다.

⑤ 입(笠)
입은 조선시대 패랭이나 흑립과 유사한 형태로, 눈이나 비, 햇빛을 막을 수 있는 챙이 있고 끈으로 턱에 고정하는 양식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중 감신총의 착립기마인물도에서 착용 모습을 볼 수 있다. 백제, 신라에서 착용된 나제립(羅濟笠), 삼국유사에 기록된 소립(素笠)을 통해 고구려에서 입(笠)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⑥ 건(巾)
건은 수산리 고분벽화의 두 남자와 각저총 여인도에서 볼 수 있다. 관모의 기본형태로 볼 수 있으며, 사회적 의미를 갖기보다는 머리가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고 간편하게 수발하는 실용적 측면에서 사용되었다.

⑦ 건귁(巾巾國)
건귁은 여성이 착용했던 관모로 각저총과 삼실총에서 볼 수 있다. 여자의 머리수식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며, 계양(琦樣)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머리를 완전히 덮는 복계식(覆琦式)이다. 앞부분이 삼각형의 변(弁)의 형상으로 고유한 쓰개양식을 이루고 있으며, 현재에도 부인들에 의해 착용되고 있는 머리수건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여러 계층의 여성들이 건귁을 착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계층구분 없이 착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2) 머리모양
삼국시대 남자의 머리모양은 머리 정수리에 상투를 튼 수계이고, 여자는 본인의 머리만으로 만든 양식과 체(韆)와 같은 다른 소재를 더한 양식을 볼 수 있다.
여자 머리모양 중 본인의 머리만으로 이루어진 양식은 얹은머리, 쪽진머리, 푼기명머리, 묶은중발머리, 채머리, 쌍계가 있다.

① 얹은머리
얹은머리는 본인의 머리를 뒤에서 앞 정수리로 감아 올려 끝을 쪽지고 고정하는 형태로, 무용총에서 볼 수 있다.

② 쪽진머리
쪽진머리는 머리를 빗어 넘긴 후, 뒤에서 모아 쪽진 형태로 각저총과 무용총, 쌍영총 등에서 볼 수 있다.

③ 푼기명머리
푼기명머리는 좌우 양볼에 애교머리와 같이 모양을 내어 늘어뜨리는 것이 특징이며, 양볼에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제외한 나머지 두발을 뒤로 빗어 낮게 트는 형태이다.

④ 묶은중발머리
묶은중발머리는 짧은 머리를 뒷머리에 낮게 묶은 형태로서 무용총에서 볼 수 있으며, 현대 여학생의 짧은 단발머리를 묶어 놓은 모양이다.

⑤ 채머리
채머리는 머리를 자연스럽게 뒤쪽에 늘어뜨린 형태로 미혼녀의 머리양식으로 보인다. 무용총에서 확인할 수 있다.

⑥ 쌍계
쌍계는 머리에 남자의 상투와 같이 두 개의 계를 맺는 것으로, 머리숱이 많은 사람이나 미혼녀, 기혼녀, 장년, 노년, 어린아이 구별없이 보편적으로 하였던 머리모양이다. 중화군 진파리 4호묘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여자 머리모양 중 다른 소재를 더한 환계, 고계, 얹은머리형이 있다.

⑦ 환계(環琦)
중앙에 높게 머리를 묶어 세우고 둥근테를 이용하여 환계를 펼쳐 놓은 양식이다. 특히 안악3호분 묘주 부인은 환계를 두르고 남은 여발을 늘어뜨리고 있으며, 덕흥리고분벽화에서도 볼 수 있다. 상류계층의 머리모양이다.

⑧ 고계(高琦)
감신총 벽화에서 볼 수 있는 머리모양으로 두발을 모두 잡아 높게 빗어 올리고 체를 더해 정수리에서 결발한 양식이다.

⑨ 얹은머리형
안악2호분 벽화에서는 본인의 두발 이외 체를 더해 머리에 얹고 양쪽 볼로 두발의 일부를 드리운 형태를 보인다. 이는 본인의 두발만으로 두상의 앞중앙에 쪽을 지어 올린 얹은머리 양식과는 차이를 보인다.

여자의 머리모양이 남자에 비해 훨씬 다채롭고 다양하였으며, 여러 가지 형태를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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