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그러나 이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그리고 그 기억을 담는 그릇인 우리의 의식은 또 얼마나 빤한 것인가? 우리가 말하고, 읽고, 행동하는 것은 이미 그다음 순간에는 더 이상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결국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말하는 ‘현재’라는 것도, 그것을 머리에 떠올리기가 무섭게 지나가 버리고 마는 미분(微分)의 찰나에 불과하지 않던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난 삼십 년, 백년, 혹은 천년에 대한 기억이 사실은 오늘 아침, 한 시간 전, 혹은 바로 이전 순간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도대체 그 기억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또한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우리는 알지 못하지 않는가. 그리고 ‘시간’이라는 것이, 애당초 시간 없이 존재하는 이 세계를 우리 의식이 인지하는 방법이라고 전제한다면, 어째서 가까운, 혹은 먼 ‘장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기억’은 있을 수 없는 것인가?
--- p.80~81
어느 황야 한가운데 값진 보석이 있다. 그곳은 사람의 발길이 아직 한 번도 닿지 않았고, 앞으로도 신의 의지에 의해 아무도 그곳을 밟지 못할 것이다. 만약에 이런 상황을 가정해 본다면, 그 보석은 현실 속의 보석이 아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현실이란, 단 한 사람의 의식 속에서만이라도 ‘이것은 현실’이라는 개념을 형성할 때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물이나 천사는 현실도 비현실도 알지 못한다. 동물은 아무 개념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라면, 순전히 정신적 존재인 천사는 완전한 개념과 자신이 온전히 하나이기에 그렇다.
현실은 무엇이 ‘단순히 있다’는 사실 외에 그것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의식’이 전제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는 이 말의 의미를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 ‘현실의 성질’은 ‘의식의 성질’에 의해 좌우된다고 대담하게 추론해 볼 수 있다. 특히 후자, ‘의식의 성질’은 모든 민족, 모든 인간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으므로, 이 지구상의 수없이 많은 장소에는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현실이 존재할 뿐 아니라, 한 장소에도 여러 현실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가정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 p.105~106
감히 그 누구도 의심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공식 교의(校醫)에 따르면, 그림자들이 먹고 자고 일하고 번식하며 살고 있는 이 미궁, 미스라임 세계만이 유일한 현실 세계였다. 통로와 계단, 강당과 창고, 갱도와 허방으로 이루어진 이 카타콤의 구조를 분석한 학자들은 이곳이 우주와 같은 ‘무한 공간’의 세계는 아닐지라도, 공간의 경계를 초월한 ‘초공간’의 세계는 된다고 늘 강조해 왔다. 예를 들어, 어느 가상의 보행자가 계속해서 같은 방향으로만 전진한다면, 이 보행자는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한 ‘공간의 만곡(灣曲)’을 따라 상상도 할 수 없는 긴 여행을 한 뒤에, 공간을 한 바퀴 돌아 원래의 출발 지점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중간에 기존의 통로나 터널을 이용하든, 굴을 새로 뚫고 지나가든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따라서 미스라임의 경계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라는 질문만큼 어리석은 질문은 또 없다는 것이 이곳 그림자들의 생각이었고, 따라서 그 누구도 그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바깥이란 ‘그냥’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설사 그런 것이 있더라도 이내 미스라임의 한 부분으로 흡수되어 버리므로, 더 이상 그것은 바깥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있었고, 계속해서 생성 발전하는 세계는 오로지 이 카타콤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 그림자들이 이 카타콤 안으로 들어왔는가, 하는 의문 역시 대책 없는 무식함의 발로로 다른 그림자들의 비웃음을 살 뿐이었다. 나갈 수가 없는데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요컨대, 의미니 이유니 하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야말로, 이 카타콤 세계에서 교양 있고 깨어 있는 그림자로 인정받는 지름길이었다. 그림자들이 이러한 자기기만이나 미망(迷妄)에 빠지지 않도록 돕는 이들이 바로 이곳의 학자들이었다.
--- p.178~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