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2년, 즉 중종 37년에 경상도 의성 지방에서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 때 향시에 급제한 그는 21살 되던 해 퇴계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25세 되던 1566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다. 임진왜란 발발시 좌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하고 있던 그는 다시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무를 총괄하였다. 선조가 난을 피해 길을 떠나자 호종扈從하였으며, 개성에 이르러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다. 서울 수복 후, 다시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훈련도감을 설치, 제조에 올라 군비를 강화하고 인재를 배양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이듬해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조용히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그 후 복관되어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으며, 1607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혜음령(지금의 벽제리 부근)을 넘을 무렵에는 비가 퍼붓듯이 쏟아졌다. 허약한 말을 탄 궁인들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면서 따라왔다. 마산역을 지날 무렵, 밭에서 일하던 사람이 일행을 바라보더니 통곡하며 말하였다. “나라님이 우리를 버리시면 우린 누굴 믿고 살아간단 말입니까?" 임진강에 이를 때까지 비는 멈추지 않았다. --- p.63
그 무렵 집으로 찾아온 신립에게 내가 물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큰 변이 일어날 것 같소. 그렇게 되면 그대가 군사를 맡아야 할 터인데, 그래 적을 충분히 막아낼 자신이 있소?" 신립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까짓 것 걱정할 것 없소이다." 나는 다시 말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과거에 왜군은 짧은 무기들만 가지고 있었소. 그러나 지금은 조총을 갖고 있습니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닌 것 같소." 그러나 신립은 끝까지 태연한 말투로 대꾸했다. “아, 그 조총이란 것이 쏠 때마다 맞는답디까?" 신립은 내 말은 무시한 채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