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 그는 누구인가? 스승인가? 도반인가? 친구인가? 토정은 왜 끊임없이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인가? 왜 나는 토정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근본도 모르던 정휴에게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친구가 되고, 형이 되고, 스승이 되었던 토정. 종이라는 좌절감, 그래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막연히 길을 떠난 정휴에게 운명처럼 나타났던 토정.
정휴는 그로 인하여 비로소 인간으로서 새 삶을 살기 시작했고, 그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었다. 찬찬히 살펴보면 정휴의 인생살이에서 토정과 연관되지 않은 것은 거의 없었다.
“그래, 내 죽음이나 마찬가지지. 토정에 의지해 꾸려왔던 내 삶이 죽어가고 있는 거야. 토정이 죽고 나야 비로소 내가 나로서 새로이 태어나는 거야. 사즉생 생즉사이리라.”--- 1권 「1장 사즉생 생즉사」 중에서
지함의 머리 속에서는 경(庚)의 해가 주욱 흘러갔다.
가깝게는 경오년(1510년)에 삼포왜란이, 경진년(1520년)에는 극심한 수해가 있었다. 경자년(1540년)에는 전라도에 민란이 일어나 백성들의 목숨과 재산을 할퀴고 지나갔다.
멀리는 이방원이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 끝에 정권을 탈취한 왕자의 난이 일어난 것도 경진년(1400년)이다. 이성계가 실권을 장악해 고려의 뿌리를 뽑아내고자 한양으로 천도한 경오년(1390년)도 그렇다.
그런 때문인지 임꺽정은 거사 당해에 송도를 비롯한 북도를 휩쓸고, 작년 경신년에는 경금(庚金), 신금(申金)이 겹쳐 한양까지 넘보았다. 그러나 신유년(1561년)인 올해 약금(弱金)인 신(辛)과 유(酉)가 와서 기세가 꺾여가고 있고, 임술년(1562년)인 내년에는 임수(壬水)가 수생목(水生木)하여 갑목(甲木) 국운을 도와 임꺽정은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형님, 지금 어디를 가시는 것입니까?”
송도를 떠나면서부터 지함이 워낙 입을 굳게 다물고 있자 정휴가 계속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떼었다.
“금기(金氣)를 모으러 가네.” --- 2권 「31장 허생전」 중에서
휴정의 목소리는 하늘로도 오르고 땅으로도 스몄다. 그러고도 불두의 한 가슴을 시원하게 적셨다.
휴정은 천제문을 다 읽고 나서 단 아래를 향해 돌아앉았다. 멧돼지는 그때까지도 눈을 뜨지 않았다.
휴정은 단하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봉선은 사실 내 벗 토정 이지함이 생전에 부촉한 사실이라. 정해년 을사월 경신일 계미시가 되거든 봉선을 지내라, 그래야 대환난을 막을 비방을 전하리라. 그런 말을 했었지.”
모두들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조선 승단을 대표하는 대선사가 술사의 벗이었다는 것도 그렇고, 대환난을 막겠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몇년 뒤, 임진년이 되면 이 땅에 대환난이 일어나오. 승속 없이 크게 고난을 겪을 것이고, 무수한 생령이 다치고 죽어요. 조정은 동서로 갈려 무능해질 대로 무능해졌고, 나라는 문약해져 싸우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어요.” --- 3권 「2장 봉선(封禪)」 중에서
토정 이지함은 말년에 이르러 그토록 동분서주하던 걸음을 멈추고 임진 대환난에 대해 함구했다. 그 까닭을 아는 사람이 없어 다들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휴정이 알고 있다는 것 아닌가.
“두고 보아라. 상(象)을 상으로만 보지 말고 변역의 이치를 궁구해야 하느니라. 그런즉 왜란은 이 나라 생령을 무수히 다치게 하고 죽게 하겠지만, 종국에는 그 왜란이 나라를 구할 것이다.”
“왜란이 나라를 구하다니요? 왜적이 사람을 마구 죽이는데요?”
불두가 볼멘소리로 물었다. 나설 자리가 아니기는 하지만 불두는 의문이 생기면 입을 닫고 가만히 있지 못한다.
“아니지,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군의 자손을 구하는 것이지. 두고 보아라. 장예원 노비 문서가 다 불에 타버렸듯이 장차 이 나라에서 사람이 숨 쉬는 소리쯤은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사람 사는 세상이 찾아온 것이다.”
--- 4권 「휴정의 계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