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쓰카지 오야분의 딸 오하루가 들어왔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은 들여다 볼 수 없지만 일단 키는 열다섯 소녀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컸다. 뭐라고 할까, 틀어 올린 머리 모양의 시마다마게(島田?)가 국화꽃 문양이 우아하게 장식된 고소데(小袖)와 잘 어우러져 매우 성숙해 보였다. 무가 풍의 차림이라 우치가게(打?)를 하고 외출이라도 하면 누가 봐도 무가의 처녀라고 볼 것 같았다. 옷차림에도 신경 쓸 만큼 부교는 소녀에게 각별한 셈이다. 이렇게까지 챙기는데 나중에 상가로 견습생 하라며 취직시킬 것 같진 않다.
그런데 소녀는 우아한 차림 못지않게 동작 하나하나가 조신스러웠다. 부교 맞은편에 앉아 있는 명준과 바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걸음을 옮겨 무릎을 가지런히 모아 앉더니 좌중을 향해 깊이 인사하고 고개를 숙인 채 양손을 포개 무릎에 올려놓았다. 공손하고 단정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단아한 몸놀림이었다. 마치 무가의 여식 같았다. 도저히 불량도당의 딸이라 생각되어지지 않을 만큼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몸에 배인 듯 예를 갖추고 있었다. 명준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말았다. 어찌된 게 오늘은 놀라운 일투성이람.
명준은 잠시 목청을 가다듬고 후쿠다 부교를 향해 머리를 까딱거리고 오하루를 향해 돌아앉았다. 부교의 얼굴에 뭔가 근심이 어려 있는 것도 같았다. 명준은 바쇼를 곁눈질하곤 소녀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여전히 소녀는 얼굴을 숙인 채였다. 바쇼 또한 모처럼 긴장감 가득한 표정을 보이고 있다--- p.86
“송구하오나 추리를 해 보았습니다. 들어주시겠습니까?”
명준은 말했다.
“못 들어줄 것도 없겠지. 무슨 추리인지는 모르겠으나 흥미롭구려.”
후쿠다가 제법 허세를 부리는 듯했으나 한 가닥 불안의 빛을 눈에서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다.
“황송한 말씀이십니다. 그저 심심풀이에 지나지 않으니 책망하진 말아 주십시오.”
“그럽시다.”
후쿠다가 태연자약하게 보이려는지, 고와메시를 한 입 덜어 먹기도 했다.
“어제, 오늘 저와 바쇼 군은 이곳저곳을 수소문하다가 주목할 만한 특징을 하나 발견해 냈습니다. 배우가 주동자 세 명에게 소개했다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이웃으로부터 지탄이나 원성을 받았더군요.”
“당연하잖소. 그런 작자들이니 습격에 가담하지 않았겠어요?”
“과연. 허나 호기심이 일었던 건 그들 모두가 정식으로 검을 잡아본 적이 없는 무뢰배였다는 겁니다. 세 명의 주동자가 아무리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 하나, 상대는 시라쓰카지. 이른바 협객을 자처하는, 응당 실전에도 나름대로 적응된 집단이지요. 바보가 아닌 이상 단 세 명이 검술 훈련도 받지 않은 작자들을 데리고 습격을 감행할 수가 있었을까, 필시 무리였겠지요.”
“그래도 실제로 그러지 않았소?”
후쿠다의 어조가 점점 힐난조로 변했다.
“심심풀이 추리에 다름 아닙니다. 결례를 범했다면 용서해 주시기를.”
“으음.”
“물론 저는 부교님께서 막부가 압력을 가했다고 해서, 사건에 전혀 상관없는 무뢰배들을 추려내 사건을 종결시켰다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교님은 막부의 압력을 불쾌해 하셨기에 바쇼 군이 개인적으로 사건을 추적하는 걸 제지는커녕 성심껏 도와주셨습니다. 강직하시지 않으면 결코 감당하실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니 성품상 압력에 의해 상관없는 무뢰배들을 극형에 처할 리는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당신은?”
정곡을 찔려서일까, 빈정대는 어조가 아닌데도 후쿠다가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바쇼는 침을 삼키며 경청하고 있었다. 명준은 반듯하게 앉은 자세, 그대로 말을 굴곡 없이 이어갔다.
“모처럼 교 요리가 나왔습니다. 즐기시면서 들어주십시오.”--- p.120
후리소데 신조만이 아니라 반토 신조 및 악사들도 그녀에게 예를 정중히 다했다. 요시와라 최고라 일컬어지는 다유답게 극진한 대접을 받는 것 같았다. 마치 홀린 듯 정신없이 쳐다보는 바쇼에게 그녀는 은근히 미소 지어 주곤 명준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했다.
“노가제랍니다. 잘 부탁드리겠어요.”
해맑은 목소리였다. 취해 보이는 바쇼가 먼저 나섰다.
“저야말로. 마쓰오 바쇼라 합니다.”
“박명준이라 합니다. 한 잔 받으시겠어요?”
“…….”
명준이라고 이름을 밝혔는데도 노가제는 별반 내색 없이 고개만 까닥거렸다.
명준은 잔을 내밀었다. 그녀가 받았다. 명준은 술을 따랐다. 그녀가 거리낌 없이 한 모금 마셨다. 그 순간 악사는 다시 비파의 현을 탔다. 대기했던 무희들도 일어나 춤사위를 흥취 나게 펼쳤다. 바쇼도 덩달아 덩실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무희들과 합류하여 한판 멋들어지게 추기 시작했다. 물론 와카도 잊지 않는다.
무뚝뚝하게 잘난 척하기보다 술 마시고서
취해 우는 것이 훨씬 나은 일이로다
어중간하게 사람으로 사느니 술병이라도 됐으면
좋았을 걸 술에 젖을 수 있도록--- p.194
노의 많은 이야기 중에서 히데요시는 이 사네모리 편을 특히 좋아했다. 삶의 황혼에 서서 마지막 불꽃을 피워 올리는 비장미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백만 대공세라는 엄청난 작전을 생각해낸 계기중의 하나였을까…… 이에야스는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쓴웃음을 물었다.
실상 히데요시가 노에 열광하고 탐닉하고 있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일이었다. 조선으로 군사를 출병시켰으면서도 나고야 성에서 은거하다시피 틀어박혀 노를 공부했고 연기자들과 다이묘들을 불러들여 몇날 며칠이고 노를 공연하며 직접 연기까지 했다. 뿐만이랴, 명나라와 강화 협상을 추진하고 있을 적엔 천황의 어소에서 역시 다이묘들을 불러 모아 함께 노를 공연했다.
천황이 보시는 앞에서 그것도 사흘 동안 스물다섯 곡이나 상연되었으니, 그야말로 광기가 아니라면 설명하기 힘든 노에 대한 집착이었다. 그 중에 열두 곡은 히데요시가 직접 주인공으로 연기했을 정도였다. 그런 열망과 동경이 광란과 같은 집착을 낳았다면, 히데요시는 스스로 사네모리와 같은 최후를 맞이하려는 게 아닐까 싶었다…….
-어라, 내 말을 듣고 지금 웃는 게요, 나이다이진?
-아, 예, 전하…….
히데요시가 일순 예리한 눈빛으로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이에야스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말을 얼버무렸다. 싱글거리며 히데요시가 턱수염을 일없이 몇 번 쓸어내리더니, 갑자기 정색하고는 종내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이다이진과 다이나곤에겐 이미 언질을 주었던 바와 같이 이 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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