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셀도르프에서의 삶은 그런 식이었다. 베토벤 소나타의 한 악절을 연주하면 조금 있다가 생전 처음 보는 괴팍한 영감 둘이 찾아와서는 연주가 잘못되었다고 아무렇지 않게 충고를 했다. 내가 20년 전 젊은 시절에 경찰 일을 시작했던 함부르크 같은 도시에서라면 그런 일은 절대 없었을 것이다. 내 말은, 내가 함부르크에서 베토벤 소나타 작품 7번을 잘못 연주했다면 그 소리를 듣는 누군가는 뭐라 말도 못하고 혼자 괴로워했을 거라는 뜻이다. --- p.17
“그 소리가, 그 소리가 들려요. 내 귀를, 그 소리가, 내 고막을 찢고 있다니까. 소리가 들리오?”
“작곡가 선생님, 뭐가 들린다고요?”
“A음…… 빌어먹을 A음이 끊임없이 들리잖소!”
그 순간 그를 정말 화나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가 들린다고 주장한 소리였는지 아니면 몹시 당황스러워하는 내 표정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음계에서 중간 C음 바로 위에 있는 A음이 들리는데…… 소름끼치는 소리굽쇠에서 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오보에에서 나는 소리 같기도 하다오. 아, 잠깐, 지금은 피아노 건반에서 소리가 나는군! 안 들린다고는 하지 마시오, 프라이스 경위.” --- p.22
연주회가 끝나면 음악협회에서 후원하는 환영회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그런 자리에서는 으레 도시 상류층 중의 상류층이 모여 샴페인을 마시며 사교계의 뒷소문을 이야기하다가, 나중에 자기들 집으로 가서는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처럼 안 어울리는 부부가 얼마나 오랫동안 부부로 남을지 신이 나서 추측해 보곤 했다.
로베르트 슈만은 클라라 슈만보다 아홉 살이 더 많아서 이제 마흔 네 살이었지만(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과음과 여러 통증과 고통으로 장기간 약을 복용한 탓에 예순네 살로 보였다. 그러나 그 통증과 고통의 대부분이 진짜가 아닌 상상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데 클라라 슈만은 전혀 달랐다. 서른다섯 살인 그녀는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났다. --- pp.55~56
창조 과정, 특히 음악에는 우연이라는 요소가 있었다. 굉장히 많은 것들이 충동적으로, 밤에 개똥벌레가 지나가는 것처럼 갑자기 번쩍했다가 사라지는 영감의 순간에 이루어졌다. 나의 세계와는 얼마나 다른가! 나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벽돌담을 쌓듯 사실 위에 사실, 그 사실 위에 사실을 쌓아야 했다. 나의 세상은 논리적 연속성의 세상이었다. 둘 다음에 셋이 오고, 셋 다음에 넷이 왔다. 이와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 p.59
“그들이 처음 만나는 것 같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전에 만났던 것을 잊고 싶었을 거예요. 1년 전 바이마르의 연주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젊은 브람스가 얼마 전에 완성한 해학곡의 초고를 가지고 왔죠. 리스트가 브람스에게 그곳에 참석한 친구들을 위해 그 곡을 연주해 달라고 청하자 브람스는 무척 수줍어했어요. 어떻게 보면 자신 없어 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리스트가 자리에 앉아 그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했어요. 연주는 완벽했고 브람스는 그 연주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했어요. 관객들도 열광했죠. 이제 리스트가 자신의 곡을 연주할 차례였어요. 그 극적인 순간에 프란츠가 우연히 브람스를 보게 되었죠. 그때 브람스가 어떻게 하고 있었는지 아세요?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졸고 있었던 거예요!” --- p.152
“그렇다면 나는 동화에 나오는 동상처럼 서서…… 천진한 참새뿐만 아니라 까마귀와 독수리 떼, 음모자들, 강도들까지 내 몸에 박힌 보석들을 하나씩 하나씩 빼 가도록 놔둬야겠구려. 나는 세상에 빛나는 음악을 주고 있소. 그런데 그 보답으로 세상은 내게 무엇을 주고 있소? 원한, 시기, 배신뿐이지요.”
내가 말했다.
“그러나 선생님, 선생님은 감사해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예쁜 아이들이 있고 아름답고 재능 있는 아내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선생님의 음악을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찬미와 수많은 동료들의 존경까지…….”
“나는 내 삶이 싫소, 프라이스! 내 삶이 혐오스럽소!”
슈만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나를 볼 수가 없소. 지금 내가 작곡하는 곡의 모든 소절에 죽음이 마치 폭풍 구름처럼 매달려 있다오.”
슈만은 내가 권하지도 않았는데 옆에 있던 의자로 비틀거리며 가더니 털썩 주저앉아 부끄럽다는 듯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는 격렬하게 흐느꼈다. --- pp.164~165
슈만이 뭔가 단단히 결심한 듯 모자를 쓰고는 구겨진 잡지를 꼭 쥐고 사무실을 나가려 했다.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사무실 문을 여는 슈만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슈만이 몸을 돌려 나를 마주 보았다.
“플로레스탄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소. 플로레스탄은 이곳에서 심문을 받지 않아요. 프라이스 경위와는 이제 ?이오. 플로레스탄이 당신 없이 일을 처리할 거요.” --- p.219
집 안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복도 중앙에는 낚시꾼 차림을 한 건장한 남자 세 명이 네 번째 남자를 말리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 남자는 도무지 힘이 없어 보이는데도 다른 세 남자들을 제압해 놓여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열린 문을 통해 거리에서 쌀쌀한 바람이 불어와 그날 아침의 신문과 뜯지 않은 한 무더기의 우편물과 악보 다발을 흩어 놓았다. 네 남자의 발밑은 흙투성이였고, 강물의 고약한 냄새가 내 코를 찔렀다. 그 냄새는 남자들의 옷에서도 났다. 울음소리와 고함과 어지러운 말들이 뒤섞여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되었다.
가장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은 네 번째 남자였는데, 그는 물론 로베르트 슈만이었다. 해초처럼 보이는 띠가 슈만의 헝클어진 머리에 매달려 있었다. 평소에는 보기 좋을 만큼 불그레하던 그의 얼굴이 그날따라 창백했고, 피부는 소금물에 담겼던 것처럼 쭈글쭈글했다. 옷은 흠뻑 젖어 있었다(쌀쌀하고 비까지 오는 날씨였는데도 코트도 없이 얇은 옷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내가 뒤셀도르프 슬럼가에서 보았던 부랑자들도 그 정도로 엉망은 아니었다. --- pp.255~256
천천히, 신중하게, 나는 메모지를 반으로 접고 다시 또 반으로 접었다. 그리고 그 종이를 잘게 찢기 시작했다. 어찌나 잘게 찢었던지 다 찢고 난 뒤에는 가는 종이 국수가 수북하게 쌓였다. 내 초라한 어린 시절에 수프라고 하던 것 속에 늘어져 있던 가는 국수와도 비슷했다. 윗옷 안주머니에 후퍼의 소리굽쇠와 넣어 둔 봉투를 꺼내 그 속에 종잇조각을 쓸어 넣었다.
새 종이를 펴고 아주 정성스럽게 서장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 p.335
클라라는 이렇게 말하고는 오른손을 머리 위로 들더니 갑자기 아래로 내려 집게손가락으로 중간 C음 위의 A음을 쳤다. 얼마나 힘차게 내리쳤는지 비명처럼 허공을 찌르는 소리에 내 몸이 움찔했다. 뵈젠도르퍼 피아노만 한 요새를 흔들고도 남을 그런 공격이었다.
“자, 다시 한 번 보세요.”
클라라가 이번에는 머리 바로 위까지 오른손을 들더니 훨씬 더 세게 내리쳤다. 별똥별이 바위를 뚫듯 그녀의 집게손가락이 아까와 똑같은 아이보리색 건반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아까 그 음이 들리는 대신 커다랗게 탁 하는 소리가 났다.
--- p.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