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프랑스가 있게 한 언급되어지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 나는 순수한 기쁨과 깊은 감동을 느끼며 그들의 진짜 이름을 여기에 기록한다. -마르셀 프루스트 『되찾은 시간』 --- p.5
이 마법의 단어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이는 바로 이 여인, 러시아의 눈 내리는 광활한 평원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이 프랑스 여인, 우리 외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세기 초에 노르베르 가문과 알베르틴 르모니에 가문의 결합을 통해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 petite pomme’의 수수께끼는 아마도 우리가 어린 시절에 매혹당했던 최초의 전설이 아니었나 싶다. 또한 그것은 어머니가 농담조로 ‘너희 할머니의 언어’라고 이름 붙였던 바로 그 언어의 첫 번째 단어였을 것이다. --- p.13
사랑과 죽음이 어린 내 머릿속에서 기묘한 결합을 이루었다. 그리고 우울하면서 아름다운 이 노래의 선율은 그 같은 혼란을 더욱 더 가중시켰다. 사랑, 죽음, 아름다움… 그리고 저녁 하늘, 바람, 초원의 향기. 노래 덕분에 이런 것들의 존재가 새삼 생생하게 내 가슴에 와 닿았다. 마치 내 인생이 바로 그 순간에 막 시작된 것처럼 말이다. --- p.17
할머니는 ‘퐁네프 가방’을 닫아서 자기 방으로 가져다 놓은 다음 우리를 식탁으로 불렀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할머니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우리들에게 차를 따라 주면서 단조롭고 차분하게 프랑스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내던진 돌들 중에는 내가 꼭 다시 찾아내고 싶은 돌이 하나 있단다….” --- p.23
어른들이 밤에 은밀히 나누는 이야기를 내가 몰래 엿들었던 것은 특히 우리 할머니가 프랑스에서 보낸 과거를 탐사하기 위해서였다. 할머니의 러시아 생활은 그보다 관심이 덜 갔다. 나는 꼭 어떤 운석을 검사하면서 그것의 표면에 박혀 있는 작고 반짝이는 수정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연구자 같았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목적지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먼 여행을 꿈꾸듯 그렇게 샤를로트의 발코니를, 내가 지난여름에 나 자신의 일부분을 남겨 두고 왔다고 믿었던 그녀의 아틀란티스를 꿈꾸었다. --- p.112
책이 꽉꽉 들어찬 먼지투성이 미로에서 보낸 그 기나긴 날들은 틀림없이 모든 사람들이 그 나이에 갖기 마련인 수도사 성향과 일치했다. 사람들은 도피를 추구하다가 어른들 세계의 톱니바퀴 속으로 끼어 들어가든지, 아니면 혼자 남아서 앞으로 겪게 될 사랑에 빠지는 모험 이야기를 꾸며 낸다. 이 기다림, 이 은둔자의 삶은 금방 고통스러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청춘기의 젊은이들은 모여서 우글거리며 단체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인 사회의 모든 시나리오를 미리 공연해 보려는 흥분된 시도이다. 열서너 살쯤 되는 이 어제의 어린아이들이 잔인하고도 냉혹하게 강요하는 역할극에 저항할 줄 아는 은둔자나 명상가는 거의 없다. --- p.165
‘사람들은 침묵이 두려워서 말을 한다. 그들은 큰 소리로 혹은 은밀하게 기계적으로 말을 한다. 그들은 모든 사물과 모든 존재를 유혹하는 그 끈적끈적한 음성에 도취된다. 그들은 비와 좋은 날씨에 대해 이야기하고, 돈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별것 아닌 것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은 심지어 그들의 숭고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때조차도 수없이 말해진 단어들과 닳아빠진 문장들을 사용한다. 그들은 말을 하기 위해서 말을 한다. 그들은 침묵을 쫓아내 버리고 싶어한다….’ --- p.190
가장 중요한 것은 내게 이식된 프랑스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내가 내 가슴속에 들어 있는 이 제2의 심장을 질식시키는 데 성공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 심장이 마지막 숨을 내쉰 그날은 내게 있어서 유령들이 나타나지 않는 삶의 시작을 의미하는 4월의 그 오후와 정확히 일치했다…. --- p.236
그것은 노래라기보다는 느린 음송, 한숨 돌릴 때마다 중단되고 소리 없는 생각의 흐름으로 박자를 맞추는 듣기 좋은 웅얼거림에 가까웠다. 그렇다, 그것은 반은 흥얼거리고 반은 낭송하는 노래였다. 너무 더워서 온몸이 무기력해지는 밤에 들려오는 그녀의 노래는 꼭 하프시코드의 가냘픈 울림마냥 청량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귀를 기울이고 있던 나는 순간적으로 내가 지금껏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외국어를, 내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언어를 듣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나는 그게 프랑스어라는 걸 알았다… --- p.274
…그것은 하나의 추억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다. 아니, 나는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보잘것없어 보이는 느낌들. 어느 여름날 저녁, 공중에 매달린 발코니의 나무 난간에서 느낀 더위. 쌉쌀하고 매콤한 풀 향기. 멀리서 들려오는 우울한 기관차 기적 소리. 꽃에 둘러싸인 한 여인의 무릎 위에 펼쳐진 책의 책장 넘어가는 소리. 그녀의 백발. 그녀의 목소리… 그리고 책장 넘어가는 소리와 목소리는 이제 긴 버드나무 가지들이 살랑거리는 소리와 뒤섞였다.
--- p.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