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는 인생의 중요한 고비들을 짚으며 전기적 사실들을 충실히 복원한다. 예술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자라나 작곡가(작곡가가 될 수 없다면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꿈꾸었던 어린 시절 이야기는 평생을 동반한 음악에 대한 애호를 설명해준다.(“나는 하루 종일 음악을 듣습니다. 음악이 한 소절 한 소절 흘러나오는 것과 나의 사유가 풀려나는 것 사이에는 일종의 대위법적인 관계가 성립됩니다.”) 열여섯 살 때 읽게 된 마르크스는 칸트(그는 자신을 칸트주의자라고 이야기한다)와 헤겔과의 만남으로 그를 이끈 청년기의 중요한 지적 사건이었으며 한동안 사회당 당원으로 정치 활동을 하게 한 사상적 동력이었다. 이상한 약물을 마시고 얼이 빠진 채 치렀지만 첫 응시에 3등이라는 기적을 안겨준 철학교수 자격 시험은 그의 천재를 입증할 훌륭한 무대였던 듯하다. 시몬 드 보부아르, 모리스 메를로퐁티와 함께 한 교생 실습에 대한 회고는 이 책이 20세기 지성계의 숱한 거물들을 조연으로 등장시키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법학과 철학을 공부하다 민족학으로 방향을 튼 데 대해서는 유년기 이래로 자신을 사로잡았던 “이국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을 이유로 들기도 하지만 1935년 초 조르주 뒤마의 주선으로 브라질 상파울루 대학에 교수로 가게 된 것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브라질로 가는 선상(船上)에서 겪은 고달픈 이야기와 그 후의 인류학적 보고는 『슬픈 열대』라는 그의 명저에 풍성하게 담겨 있기도 하거니와 그는 상파울루 대학에서 첫 학년도가 끝나자마자 곧장 브라질 내륙으로 들어가 카두베오족과 보로로족 마을 탐사에 돌입했다. 현장 민족학자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1939년 브라질을 떠난 뒤, 1985년 미테랑 대통령의 공식 방문 때 동행하기까지(그것도 겨우 며칠 간) 브라질을 다시 가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묘한 놀라움을 안겨준다.
2차 세계대전 발발로 동원령을 받아 귀국한 그는 연락 장교로 병역을 마친 후, 고등학교 교사로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했으나 유대인이었던 탓에 인종차별법의 적용을 받아 삼 주 만에 해직되기도 한다. 그 무렵 알베르트 메트로, 로버트 로이 등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던 인류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쫓기듯 조국을 떠나 뉴욕으로 건너간다. 뉴욕에서 앙드레 브르통, 막스 에른스트 등 초현실주의자들과의 교류는 예술에 대한 심미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고 그는 회고한다. 청바지 상표인 리바이스와 자신의 이름이 혼동되면서 겪은 이런저런 일은 웃음을 참기 힘든 에피소드다(최근 버클리에 갔을 때 겪었던 이야기 하나 : 식당 종업원이 자신의 이름을 듣고는 이렇게 물었다. “The pants or the books?”). 그러나 무엇보다도 로만 야콥슨과의 만남은 그에게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난 당시 일종의 소박한 구조주의자였어요. 나는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구조주의를 실행한 거지요. 야콥슨은 구조주의가 언어학이라는 학문 속에 이미 구성되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었어요. 나로서는 그 사실이 하나의 계시였지요.” 뉴욕에서 프랑스 대사관의 문정관으로 일하고 있었을 때는 미국을 방문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카뮈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사르트르에 대한 그의 회고에는 냉담을 넘어 비아냥마저 담겨 있다.(“우리는 단 한 차례 마주앉아 점심 식사를 했지요.”)
1947년 프랑스로 완전히 귀국한 후, 49년과 50년 이태 연속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 자리에 지원했으나 실패한다. 그런데 이 잇단 실패로 더 이상 대학교수가 될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이 막간의 작업으로 기획된 『슬픈 열대』의 집필 계획이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그리고 그 집필 계획을 들고 갈리마르 출판사를 찾아갔을 때 브리스 파랭이 퇴짜를 놓았다는 이야기도 빼놓기 힘들다(에리봉은 푸코의 『광기의 역사』 역시 같은 편집자에 의해 출판을 거절당했다고 응수한다).『슬픈 열대』가 넉 달 만에 완성되었으며, 초판이 기본적인 포르투갈 철자법도 확인하지 않은 오류투성이라는 고백도 흥미롭다. 그해 공쿠르상 심사위원회가 이 책이 소설이 아니어서 시상할 수 없다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는 것까지.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입성하는 것은 그로부터 10년 후, 오랜 친구인 메를로퐁티가 앞장서 지원서를 내고 애쓴 결과였다.
레비스트로스는 푸코, 라캉, 바르트와 함께 6,70년대 구조주의를 대표하는 한 묶음의 사상가로 분류되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한다.(“나는 당신이 방금 거명한 인물들 간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 중 한동안 절친한 사이였던 라캉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대여섯 번은 읽어야 했어요. 메를로퐁티와 나는 그 점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우리에겐 시간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그는 68년 5월의 사건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드러냄으로써 사회 참여에 열성을 보였던 젊은 시절의 자신과는 이미 오래 전에 단절되었음을 숨기지 않는다. 레이몽 아롱에 대한 그의 지지와 사르트르에 대한 비판 역시 같은 맥락이다. 1981년 정신문화연구원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당시 한국 정치 상황에 침묵으로 일관했던 것과 연결지어 자신의 고고학적 기질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당신은 참여 지식인이 아닙니까?”라고 묻는 에리봉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아닙니다. 사람들이 내게 지적인 권위라는 것을 주었다면, 그것은 내 작업의 총체, 엄격함과 정확함의 신중한 추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이야말로 제한된 영역 속에서 사람들이 나의 말에 귀기울이게 하는 권리를 내가 조금 얻을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해요. 만일 내가 알지 못하는 혹은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문제들을 판단하는 데 그 권리를 이용한다면, 나는 권리를 남용하는 셈이 되는 거지요.” 1964년부터 1971년까지 네 권의 『신화론』을 집필하는 동안 그는 매일 아침 다섯시나 여섯시에 일어났고, 주말을 몰랐다고 회고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작업을 하지 않을 때면 우울한 권태에 휩싸이고, 내 의식은 나를 괴롭힙니다. 작업하는 삶이 다른 것들보다 나를 더 기쁘게 해주지는 않지만, 최소한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게는 해줍니다.”
2부에서는 그의 주저인 『친족의 기본 구조』『야생의 사고』『신화론』(전4권, 『날것과 익힌 것』『꿀에서 재로』『식사법의 기원』『벌거벗은 인간』) 등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자신의 학문적 궤적을 돌아보고 자신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대답하고 있다. 특히 자신이 역사를 무시한다는 비판에 대해 그는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거대한 역사 발전 법칙들을 단호히 거부하며 역사의 어찌할 수 없는 우연성에 스스로를 굴복시킨다. “역사에 대한 나의 존중과 취향은, 그 어떤 정신의 조작도 사태가 실제로 진행되는 예측 불가능한 방식을 대체할 수 없다는 느낌을 역사가 내게 준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우연적인 사건은 내게는 어찌할 수 없는 소여(小與)인 것으로 보입니다. 구조 분석은 그것을 다루어야 합니다.”
3부에서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면서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비판을 자신의 인류학 탐사와 연결짓는다. 이와 함께 문학, 미술, 음악이 자신의 삶과 학문에 끼친 영향을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