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친구가 생겼다는 기분을 정말 몇십 년 만에 느꼈다. 연애가 시작될 때 시야가 점점 열리는 듯한 행복감과는 비슷한 듯하면서도 좀 다르다. 평소의 경치가 아주 조금 달라 보인다. 자신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는, 사소하지만 가슴 설레는 변화다. 다시는 쇼코와 떨어지지 않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딱 한 명이라도 여자 친구가 생기니 자신의 색감과 형태가 또렷하게 느껴지면서 나라는 존재에 자신감이 생겼다.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 p.48
그녀는 스토커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주장하는데, 그 집요함과 진지함은 아무리 생각해도 스토커 그 자체다. 게다가 쇼코는 그녀를 스토커라고 단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스토커라는 말을 그녀 앞에서 사용한 기억도 없다. 다만 ‘블로그에 기분 나쁜 메일이 온다.’ 하는 말만 했을 뿐이다.
불쑥 집에 찾아왔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시무라 에리코라는 인간은 착각이 좀 심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에리코의 정신 상태가 좀 이상한 게 아닐까. 물론 나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일 때문에 몹시 바쁘다고 하니까, 그 스트레스 때문인지도 모른다. 연애가 좀처럼 오래 가지 않는다는 말도 했는데, 어쩌면 아직도 실연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정도 미인에게 남자가 얼씬거리지 않는다는 것도 좀 이상한 일이 아닌가.
‘친구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 p.95~96
‘친구는 어떻게 만드는 거야? 이 여자들과는 어떻게 알게 되었어? 싸우지 않아? 때로 귀찮게 느껴지는 일 없어? 사이가 멀어지지 않는 요령 같은 거 있어? 상대가 피하면 어떻게 거리를 좁혀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무슨무슨 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야?’
자신의 꿈이 그렇게 거창한 것일까. 그저 성욕과 이해가 개입되지 않는 상태에서 타인과 편안한 관계를 쌓고 싶을 뿐이다. 서로 마음 놓고 긴장을 풀고서,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마주하고 싶다. 같이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면서 고민거리를 털어놓고, 건강을 염려하고, 언젠가는 서로의 결혼식에 초대한다. 취미와 기쁨을 공유하고, 얘기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만큼 실컷 통화를 한다. 이 세상에 그런 상대가 딱 한 명이라도 좋으니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게 그렇게 사치스러운 바람일까. --- p.149~150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공감’이라고 생각한다. 에리코만이 아니다. 모두가 몸을 비틀며 눈물을 흘릴 정도로 공감을 원한다. 공감하기 위해서라면 돈은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공감을 원하기에 모두가 인터넷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과 머리를 가동하는 품을 들이지 않고도 순식간에 시간과 환경을 뛰어넘어 ‘나는 혼자가 아니다’ 하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강력한 알코올 같은 힘. 단방에 공감할 수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글과 일도 에리코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그렇다, 발언의 장이 주어진 이상 그 사람은 상대를 끌어들이고 공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공감하게 하지 못하는 여자는 사람을 고독하게 만든다.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는 여자는 이 차가운 세상을 더 살벌하게 만든다. --- p.180~181
“내 친구가 되어줘. 다시 시작하고 싶어. 그리고 나를 무시하거나 싫어하거나 멀리 하지 않겠다고, 지금 여기서 약속해. 그럼 나, 너에게 겁주지 않을게. 이런 일, 두 번 다시 하지 않을게. 안심하고 사귈 수 있는 보장이 있으면, 나는 너의 둘도 없는 친구가 될 수 있어. 약속할게. 맹세할게.”
그렇게 겁 난 표정 짓지 마. 에리코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기원했다. 물고기처럼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눈으로 입을 뻐끔거리지 말라고. 나나 너나 피해자야. 일본의 여자 사회를 촘촘하게 메우고 있는 거미집 같은 치밀한 규칙에서 떠밀려나온, 낙오자라고.--- p.245
변하고 싶다. 눈물이 쏟아질 만큼, 변하고 싶다. 사람과 피가 통하는 대화를 나누고, 홀가분한 심정으로 어떤 장소에든 적응하고, 자신이 즐겁다고 믿는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안정된 정신 상태의 인간이 되고 싶다. 소녀 시절부터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 일이다. 눈앞에 놓인 일에 열성을 다해 임하면, 성장은 저절로 따라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입시도 취직도 일을 통한 실패도 성공도, 섹스도 연애도 뭐 하나 에리코를 변화시켜 주지 않았다. 지식은 그저 쌓여만 갔지, 게이코가 떠난 그날의 자신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사람은 경험을 통해 바뀌는 법인데, 그런 건 이상하지 않은가. 잘못되지 않았나.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사춘기의 사소한 문제가 이렇게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다니, 자신은 아무래도 좀 이상한 것 같다. 이러고 있는 지금도 몸의 세포가 확실하게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두려워 견딜 수가 없다. 미숙한 채, 아무것도 거머쥐지 못한 채 나이만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몸이 오그라들 정도로 끔찍하다.
정말 이대로 평생, 아무런 변화 없이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 p.314~315
“촌스럽기는. 어른이 되지 못한 건 내가 아니라, 너라고. 엄마의 소중한 아들 노릇, 이제 졸업해야지. 자기만 소중하게 여겨주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잖아, 이 땅딸보가, 나를 두고 뭐라뭐라 하기 전에 너의 그 엿 같은 재주나 좀 어떻게 해보라고. 야, 일어서. 일어서라고. 이 세상에 위태롭지 않은 인간관계가 애당초 있느냐 말이야. 여자와 여자도, 남자와 여자도, 남자와 남자도 다 마찬가지 아니냐고. 어떤 관계도 형태가 변하고, 서로 싫어하고 미워하고, 거리를 재고 또 손질하면서 끈질기게 계속될 수밖에 없는 거라고. 기껏 관계 하나 손에 넣었다고 배가 부를 수 있겠냐고. 아무것도 안 하는데도 모든 게 다 갖춰지고 승인되고 문제가 전부 해결될 리 없잖아.”
--- p.3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