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88세가 되던 지난해, 외손녀 여준이가 할머니의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신혼 시절 등 살아온 삶의 얘기를 듣고 미술작품과 책으로 기록하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망설였다. 구순을 앞둔 나이인데 머릿속에 무슨 기억이 남아 있을까? 뇌세포는 하나하나 죽어가고 있는데. 자신은 없었지만 용기 내어 인터뷰를 승낙했다. 그렇게 나는 88년 전으로 돌아가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여준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모여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나오게 됐다. 이를 계기로 잊고 있었던 나의 지난 삶을 되돌아볼 수 있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중략) 이제야 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인생이건만 몸이 내 맘 같지 않아 서글프다. 존경을 받고 감동을 줄 만한 이야깃거리가 없는 것도 부끄럽고 아쉽다. ‘그러나 지금 나는 행복하다!’
---「할머니의 글」중에서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는 내가 있었다. 사실 할머니의 이야기라고 하면 진부한 ‘옛날이야기’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나 또한 옛날 옛적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게 됐지만 그 속에는 현재의 내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나도 있고, 미래의 나도 있었다. 어느 날 들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연애 이야기 속에서 나의 연애를 찾기도 했고, 대학 시절 고민을 들으며 어제의 근심을 떠올리기도 했다. 또한 할머니의 어린 시절 철없는 이야기에 어린 나의 모습이 생각나 ‘내가 할머니를 닮았구나’
하며 웃음 짓기도 했고, 할머니의 결혼 후 이야기에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기도 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단순히 80여 년 전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보다 조금 빨리 이 세상을 살고 있는 한 여성의 삶의 기억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현재 나의 고민을 해결하기도,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도, 미래의 나를 기대하게도 하였다.
---「손녀의 글」중에서
하지만 작은 바람은 있다. 그저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이 책을 덮은 후, 당신의 할머니가 혹은 당신의 어머니가 처음부터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아니었음을, 그녀들도
우리와 똑같이 소중한 인생사를 지니고 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면 감사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전화 한 통 걸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면 그걸로 좋다. 책을 마무리하며, 엮은이의 글을 쓰는 동안 몇 번이고 눈물이 차올랐다. 집으로 향하며 할머니께
전화를 드려야겠다. ‘여보세요? 할머니! 잘 지내셨어요?’
---「손녀의 글」중에서
오늘은 날도 개고 공연히 아침부터 기분이 상쾌하였습니다. 그리고 보니 11시 30분, 당신의 글을 손에 확실히 받았습니다. 어찌도, 어찌도 반가운지 미칠 것 같았지요. 당신의 손을 대하는 듯한 촉감! 가슴은 고동, 손은 진동, 눈시울은 눈물. 더 형용할 수 없습니다. 오직 기쁠 뿐, 그렇게 나를 기뻐해주실 글월을 이제야 주시는지, 원망이 더욱 컸지요. 흐르는 눈물을 억누르고 한 자 빠짐없이 읽고 또 읽었습니다. 불편 없이 무사히 계시다니 더욱 반갑습니다. 그동안 퍽이나 분주하셨든 양 당신의 매일의 생활이 목전에서 보는 것 같습니다.마치 주마등과 같이 국진이가 학교에 가고 종이가 있는 곳을 몰라 찾다가 여기에 그냥 계속합니다. 용서하세요. 매일 저녁 찾아오는 miss와의 저녁 거리 산보. 방 안에서의 유희. 10시까지 중동 거리를 방황하시는 당신의 모습을 그릴 때 무한히 행복스러우신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짜증내는 혹이 없을 때 마음껏 즐기시지요. 차후에 후회가 없으시도록. 그러나 열이 과하면 발광이 생기니, 지나치게 즐기시고 귀가 후 추방은 당하시지 마시도록. 후일을 참작하여 적절히 소일하심이 어떻습니까. 은근히 질투가 나서요. 호호…….
---「할머니의 연애편지 - 편지 둘」중에서
언제였나……. 막내가 갑자기 나에게 왜 이렇게 사느냐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 그때 막내가 우연히 내가 쓴 시와 글을 보고는 한마디 하더라고. ‘엄마는 왜 선생님도 그만두고 아버지 인생을 따라 살고 있느냐’ 하면서. 그 이야기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잖아. 왜 그랬을까? 이미 세월은 흘러갔고, 내 뜻을 이루고자 하는 용기도 없고……. 나의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하여 자식들의 꿈을 응원해주자고 생각했지.
---「그 이야기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잖아」중에서
요즘은 어떻게 사느냐고? ‘지나가는 것은 지나가는 대로 내버려두라. 지금이 중요하다.’ 이 문구를 어디선가 보고 실천중이란다. 그래서 이제는 하루의 삶을 귀하게 여기고 조금 더 지혜롭게, 보람 있게, 베풀며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이제 아흔이 가까워 오니 육신의 연약함도 느끼지만 그 아픔의 과정을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여정이라고 믿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지내는 중이야. 네가 보기엔 어떠니, 할머니 잘 살고 있는 것 같니? 허허.
---「요즘은 어떻게 사느냐고?」중에서
89세라는 생의 문에 입성했다. 주님 곁에 갈 날이 하루하루 가까워짐을 새삼 느낀다. 나이가 많다고, 기력이 없다고 손을 놓고 먼 산만을 바라보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자. 할 일이 많다. 아직은 볼 수 있는 눈을 주셨으니, 말씀을 하루에 한 시간씩 읽어야지,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셨으니 아름다운 음악도 들어야지. 자식들과 재미있는 이야기 나누어야지. 또 맛있는 것 사주면 기쁨으로 맛있게 먹어야지.
걸을 수 있는 발을 주셨으니 마트에 가서 여러 가지 재료를 사다가 내 나름대로 요리법으로 맛있게 만들어 식탁에 차려놓는다. 한 끼에 하나씩은 새로운 메뉴를 생각하며
영양가도 생각한다. 옛말에 ‘노인이 되면 밥이 보약이라고’, 그렇다, 밥을 맛있게 먹고 나면 기운도 나고 든든한 기분이 든다. 늙으면 밥 힘으로 산다나.
“이것 맛있으니 당신이 더 드셔.” “아니, 당신이 더 먹으라니까.” “그러면 똑같이 나누어 먹자.” 반으로 나누어 흐뭇한 마음으로 먹는다. 이런 시간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바로 이 시간이 가장 귀하기에 희망을 노래 삼고 ‘오늘도 행복했습니다’ 고백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자.
---「할머니의 일기 - 1월 2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