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태양과 정열의 나라 스페인과 무한한 잠재력과 신비로움으로 가득한 라틴아메리카 대륙에 대해 요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관심과 호기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들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을 뛰어넘어 그들의 문화가 가지고 있는 전통과 뿌리를 우선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는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미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콜롬비아 출신의 세계적인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라든지, 칠레 출신의 유명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 등은 그들이 젊었을 때 크게 유행했던 프랑스풍의 문학적 흐름을 추구하는 것을 지양하고, 스페인의 고전문학에서 그들의 문학적 뿌리와 정체성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라틴아메리카가 배출한 그 밖의 대문호들도 스페인의 고전문학에서 그들의 문학적 소재와 발상을 모색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지구상에 퍼져있는 스페인계 세계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hispanidad’의 근본이 바로 스페인과 스페인인(人)들이 향유하고 있는 오랜 역사와 문화, 특히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인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그들의 문학적 전통에 있음을 입증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hispanidad’의 근본의 한 가운데에 바로 ‘황금세기’라 불리는 16-17세기의 스페인과 당시의 스페인이 구가하였던 절정의 문화와 예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즉, 오늘날의 ‘hispanidad’은 스페인의 이 ‘황금세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그 모습이 형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로페 데 베가의 ‘국민연극’으로 상징되어지는 극적 쇄신과 연극의 대중화에서 바로 이 ‘황금세기’에서 성취되어진 문학 ? 예술적 결과물들의 핵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로페 데 베가의 연극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스페인과 라틴아메리카 세계를 향해 내딛는 진정한 첫걸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Ⅱ.
스페인이 배출한 불세출의 극작가 로페 데 베가는 『돈키호테』의 세르반테스와 함께 천년 역사의 스페인 문학사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커다란 두 개의 기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서양 연극사 전체를 통해서 보더라도 로페 데 베가는 영국의 셰익스피어와 쌍벽을 이루는 대단히 중요한 극작가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 「책머리에」 중에서
Ⅲ.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라는 단일 작품을 통해 르네상스와 바로크라는 서로 다른 두 시대가 교차하던 절박했던 시기의 스페인인(人)들이 겪었던 삶과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절묘하게 응축하여 묘사하였고, 이를 통하여 가장 스페인적인 요소들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인간사의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 공히 적용될 수 있는 인간 정신의 영속적인 카테고리를 설정하였던 반면, 이와 동일한 가치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로페는 세르반테스와 달리 다방면에서 골고루 그의 천재적 기질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즉, 그는 어느 한 작품이나 장르에 국한되어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창출하는 대신, 소설, 연극, 시, 산문 등등에 걸쳐 스페인의 전통에 기초한 스페인 민족 특유의 목소리를 나타내는 데 그 어느 작가보다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던 것이다. --- 「로페 데 베가와 그의 생애」 중에서
Ⅳ.
로페는 자신의 수많은 희곡과 시 작품들 안에 스페인의 모든 유형의 인간상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인생들을 용해시켜 이를 연극무대를 통하여 보여주었다. 당시 스페인인들의 관심을 끌만한 어떤 역사적 혹은 동시대적 주제나 사건, 이데올로기, 또는 인물들 중에서 상상을 초월할 만큼 방대한 로페의 작품 망에 걸리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결코 당시의 가치관과 대립하며 불안감을 조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당시의 스페인인들이 느꼈던 바를 절묘하게 표현하여 이를 연극이라는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여러 가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들로 인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던 당시 스페인의 위태롭고 처절했던 모습과 이를 타파하기 위한 영웅적 몸부림들을 가장 적절하고 명확하게 묘사하였던 것이다. --- 「로페 데 베가와 그의 생애」 중에서
Ⅴ.
로페가 일생동안 보여준 여성편력과 각종 불륜, 그리고 말년의 불행한 사건들로 점철된 그의 개인적인 행적은 윤리적 측면으로 봤을 때 후세의 본보기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겪으며 그가 이룩해 낸 믿을 수 없으리만치 엄청난 그의 문학적 성과는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인 도덕적 과오의 유무를 떠나서 인류의 역사에 길이 남을 한 거장에게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어쩌면 로페는 개인적인 윤리적 결함들과 그가 남긴 위대한 문탇적 자산을 서로 맞바꾼 것일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문학작품들을 통해 로페가 발산했던 끝없는 문학적 풍부함은 바로 그가 평생을 걸쳐 주저함 없이 온몸을 던져 겪었던 수많은 로맨스와 고뇌, 희열과 분노, 그리고 열정과 슬픔 등등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로페가 시종일관 올곧은 인생만을 고집하여 살았더라면 그는 윤리적으로는 떳떳해졌을지 몰라도 최소한 지금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그의 주옥같은 문학 세계는 상당 부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 「로페 데 베가와 그의 생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