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티 난민 관련 이민국 통계는 놀라웠다. 아이티가 지난 10년의 대부분을 폭압적인 독재자 밑에서 고통을 겪었건만, 이민국은 해안경비대에 길이 막힌 난민 99.9%를 되돌려 보냈다. 1981년부터 1991년 사이 난민 2만3천 명 중에서 미국이 받아 준 난민은 고작 스물여덟 명뿐이었다. 같은 기간에 미국은 쿠바, 구 소련연방, 캄보디아, 에티오피아,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이란 출신 난민 수십 만 명을 환영했다. --- p.37
학생들은 부시 행정부가 엄청난 위선에 빠져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1989년 11월, 대통령은 베를린 장벽 철폐와 동유럽의 민주주의 물결에 찬사를 보냈고, 그로부터 한 달 뒤 행정부는 보트 피플을 베트남으로 돌려보낸다고 홍콩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바로 뒷마당에서, 피어나던 민주주의가 좌절하고 있었다. 아이티인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도피하고 있었으나, 이민과 자유의 땅 미국은 그들을 막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다. --- p.51
그들은 법무부에 싸움을 걸겠다는 것이었다. 법무부로 말하면, 수천 명의 법률가와 엄청난 자료를 확보하고 있으면서 단 한 명의 막강한 고객, 부시 행정부에게 봉사하는 소송기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소송은 대통령의 외교정책, 공해에서의 해안경비대의 주요 작전의 법적 성격, 1500마일 떨어진 해군기지의 난민 수용소의 법적지위를 쟁점으로 할 것이었다. 원고에 포함될 수 있는 사람의 수만 하더라도 수천 명이 될 것인데, 그들 잠재적 원고들과 연락도 불가능할 것이거니와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언어와 문화의 장벽이 일을 훨씬 더 복잡하게 할 것이 분명했다. 평생 변호사를 하더라도 이렇게 복잡한 사건을 다시 만날 수는 없을 것이었다. --- p.59
학생들이 모두 떠난 후, 고 교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긴장되고 피곤했으나 타이핑을 시작했다. 새벽 3시에 커피잔을 다시 채웠다. 여섯 시가 좀 지나자 검은 하늘이 옅은 회색으로 바뀌었다. 아홉시가 되자 눈이 건조해지고, 어깨가 결렸지만 40페이지째 진행되었다. 11시에, 뉴욕에서 돌아온 래트너가 전화를 해서 초고를 보자고 했다. 고 교수는 얼굴에 물만 끼얹고 학교로 달려갔다. 래트너가 초고를 읽는 동안 잠깐 끼니를 때웠다. --- p.131
부시 대통령이 즉각송환명령을 내리자, 그 효과는 워싱턴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었다. 놀란 UN 간부들이 부시정책이 명백히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제33조 위반이라고 선언했고, 인권단체들도 백악관을 비난했다. 그러나 국무부는 아이티인의 망명신청은 대체로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공화당 의원들은 난민들이 가져올 사회복지제도에 대한 부담감을 강조했다. --- p.201
몇 년 동안 고 교수는 법조계의 진보인사들과 교분을 나누었는데, 그들은 이제 줄을 지어 새로운 민주당 정권에 참여하기 위하여 수도로 입성하고 있었다. 그는 학생들의 이해를 위하여 칠판 위에 분필로 사각형과 화살표로 그림을 그리면서, 각 인물이 클린턴의 백악관에서 아이티 정책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설명했다. --- p.263
고 교수는 변론을 시작했다. 저희는 미국에 입국할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는 아이티인 난민들이 자신들이 탈출한 그 나라로 강제로 돌려보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아이티와 미국 사이에는 700개 섬이 있습니다. 박해를 피해 나온 아이티인들은 바하마든, 케이맨 아일런드든, 쿠바든, 버진 아일랜드든, 그 외에 어디로든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합중국 정부가 아이티 주위 해상에 베를린 장벽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 p.340
존슨은 판결문에서 “구금된 아이티인들은 범죄자도 아니고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는 존재도 아니다. 임산부도 있고 아이들도 있다. 그들은 단순히 치명적 질병을 앓고 있는 불운한 희생자일 뿐이다. 정부는 구금자의 질병이 간첩이나 살인범에게나 해당되는 무기한 구금을 정당화할 사유가 된다는 점을 입증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 p.416
"만일 여러분 모두가 충분히 용감하다면 무엇을 해낼 수 있을까요? 아이티 사건이 기준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불리한 법에 대항했고, 모두들 우리가 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자신들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서로 격려했습니다. 밤낮 없이 열심히 했습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 동료들은 믿을 수 없는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승소했습니다. 여러분이 진지하게 생각하는 문제가 있다면, 행동해야 합니다." --- p.439
그의 세계관으로는, 예일 로스쿨처럼 우수한 학교의 재능 있는 학생들은 사회에서 가장 고통 받는 이들에게 봉사할 의무가 있었다. 아이티 난민들만큼 - 터키의 고문 피해자들, 티벳의 종교적 난민들도 마찬가지이지만 - 가장 명석한 학생들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은 가장 낮았다. 고 교수는 예일이 총잡이나 양성하는 다른 로스쿨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봉사를 위하여 공부하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도덕적 목표를 가진 로스쿨을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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