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매일 아침 텔레비전에서 방송하는 오늘의 운세 코너를 본다고 했지. 운명을 믿냐?
……생각해보니 사랑을 믿느냐고 묻는 것만큼이나 쑥스러운 질문이네. 나는 믿고 싶지 않다. 운명도, 사랑도. 어느 쪽도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까. 혹은 “그게 그거였던가?” 하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은 거니까. 그런 거라면 없는 것과 다름없다. 운석이 지구에 충돌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충돌했을 때는 어차피 모든 것이 끝나 있다. --- 「러브리스」 중에서
내게는 친구가 없다. 이런 일을 하고 있으니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란 게 있어도 곤란하다. 술 취해서 무심코 비밀을 이야기했다간 끝장이다. 사귀는 여자는 교환이 가능하니 괜찮다. 사귀는 동안에도 자신의 사회적인 지위에 대해서는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다. 대화를 하지 않아도 만족시킬 수 있는 수단은 널려 있으니까. 하지만 친구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꼭 서로의 직업이 화제가 된다. 그래서 내게는 친구가 필요 없다.
그건 어쩌면 과거를 버릴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누야마와 이야기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내게는 추억을 이야기할 상대가 없다. 예를 들면 로켓이라는 개를 키웠다는 것. 어릴 적, 내 눈에 비친 고향 풍경. 학교생활. 그런 기억도 전부 내가 멋대로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내 기억은 어디까지나 나만의 것이 되어, 변형하거나 소멸해도 지적하는 사람도 없고 알아차리는 사람도 없다. 기억을 공유하는 상대가 없으니까. --- 「로봇에 대한 추억」 중에서
전에 텔레비전을 보는데, 가요 프로그램에 나하고 별로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아이돌이 나왔다. 아이돌은 데뷔 당시의 영상을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우와, 엄청나게 옛날이네. 그리워라!” 그랬더니 사회자가 코웃음을 쳤다. “너처럼 어린애한테 옛날이고 뭐고가 어디 있어. 그저 몇 년 전 영상일 뿐이잖아!”라고.
나는 몹시 화가 났다. 중년의 그 남자에게 증오를 품었을 정도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몇 년 동안 톱 아이돌로 뛰어온 그녀와 불규칙한 생활을 해서 얼굴이 팅팅 부은 당신하고는 시간이 흐르는 게 다르다고.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흐르지 않는다. 같은 1분이어도 애가 탈 정도로 길 때가 있는가 하면, 눈 깜짝할 사이일 때도 있다.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시간의 무게와 잔혹함을 의식하지 않고 흥흥거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 어려도 시간에 짜부라질 것 같은 경험을 한 사람도 있는 법이다. --- 「디스턴스」 중에서
운석이 부딪친다면 지구의 생물은 절멸할 것이다. 어릴 적에 내가 무서워했던 쓰나미는 댈 것도 아니다. 이 바다도 녹색의 산도 전부 타버려서 형체가 없어진다. 그것이 3개월 후에 닥쳐온다고?
하지만 지구에서 도망친다고 해도 좁은 로켓을 타고 우주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지구가 멸망하지 않을 가능성은 로켓에 탄 1000만 명에 뽑히는 것보다 낮은 확률이다. 그런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린 채 캄캄한 공간을 떠다녀야 하는 건가?
이런 류의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대개 주인공이 대활약을 하여 위기를 막거나 우주에 적응한 인류가 은하 전쟁을 일으키는 내용. 혼돈스럽지만 그곳에는 반드시 미래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현실적인 종말이 3개월 앞으로 닥치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기 힘들 것이다.
확신을 갖고 3개월 후의 자기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운석이 부딪치지 않더라도 그 전에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나 죽을지도 모른다. 3개월 후에 죽는다는 걸 알고 있어도 그때까지는 생활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 또 공포와 절망이 엄습해올지도 모르지만, 내가 처음에 생각한 것은 그런 것이었다. --- 「입강은 녹색」 중에서
계기반 위에 붙어있는 내 기사 신분증. 거기에 기록된 남자 이름을 그녀는 분명히 보았다. 보고도 나를 여자 취급했다. 놀리지도 않았고,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았다.
우리는 자유롭게 몸을 개조한다.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마지막까지 최대한 호흡하기 쉽도록 살아 있는 한 자신을 품종개량한다.
슬슬 아침 뉴스에서 일기예보를 하려나 생각했더니만, 텔레비전은 아직 로켓 탑승자 당첨 발표를 계속하고 있다.
그녀와 내 행위를 무의미하고 어리석다고 단정한다면, 로켓을 타려는 자도 로켓에 타지 못해 비탄에 빠진 자도 마찬가지로 무의미하고 어리석다.
우리는 살아 있다. 아무리 종말이 가까이 다가와도 슬프리만큼 살아 있다.
내일도 쇳덩어리를 타고 거리를 달리자. 가고 싶은 곳에 도착할 때까지.
그곳은 분명 화성보다도 목성보다도 멀 것이다. --- 「도착할 때 까지」 중에서
원숭이는 나를 사랑한다고 해.
처음에는 그런 튼리, 완전 민폐였어. 함께 사는 동안에 솔직히 애착도 조금은 생겼지.
하지만 나는 역시 원숭이를 사랑하지 않아. 다만 혼자 되는 것이 싫은 것뿐. 아는 사람도 없는 이런 곳에서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잖아. 그러니 원숭이와 함께 사는 것뿐이야.
나는 아사다 역시 별로 사랑하지 않았어. 이제야 알 것 같아.
나에 대한 원숭이의 헌신과 배려, 나를 생각하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나는 지금까지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어.
태어난 곳에서 멀리 떠나, 그래도 “이 사람하고만큼은 헤어질 수 없다”고 생각할 만한 상대는 나한테 없다고.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버리고, 중력과, 고향을 뿌리치고. 원숭이는 오직 나만을 추진력으로 삼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손에 넣었어.
하지만 우습게도 원숭이가 사랑을 바치는 대상인 나는 빈털터리.
지구는 어떻게 되었나 모르겠네?
원숭이는 선택받아 탈출 로켓에 탄 사람이지만 나는 달라. 그저 원숭이의 열정에 떠밀려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런 곳까지 따라와 있을 뿐.
나는 무서워. 원숭이가 언제 맹목적인 사랑에서 깨어나 내 속의 공허를 알아차릴까 생각하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역시 어째서 내게 사랑의 말을 계속 속삭이는 걸까 생각하면 무서워.
원숭이의 사랑은 나를 묶는 사슬이야. 나를 묶어 절벽에 매달아놓고 상실의 공포를 부채질하는 사랑이야. --- 「꽃」 중에서
그때 퍼뜩 느낀 외로움은 지금도 기억난다. 아주 맛있는 요리를 다 먹어버렸을 때와 같은, 충실과 허무가 표리일체가 된 감각.
함께 아름다운 광경을 보는 우리는 ‘같은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는 한 가지 사실밖에 연결되는 고리가 없다. 사고와 논리를 초월한 압도적인 실감으로 그렇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 어쩔 줄 모를 고독감과 희미하게 존재하는 짜릿한 연대감이 내 감정을 극도로 고양시켰다.
누군가와 이어지는 수단이 자신의, 그리고 상대의 외로움을 느끼는 것밖에 없다니.
마음이란 얼마나 모순된 구조로 움직이는 것인지.
어슴푸레한 빛의 난무 속에서 모모의 뇌 속에 흐르는 음악은 웅장한 것이었을까? 슬픈 것이었을까? 아무리 그걸 알고 싶어도 이젠 두 번 다시 모모에게 물을 수가 없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버렸기 때문에.
--- 「그리운 강가의 마을 이야기를 해볼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