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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the lovers

연인, the lovers

: 불순한, 혹은 지순한 그들의 매혹적인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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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문화 교양서 top100 5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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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4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32쪽 | 616g | 148*210*30mm
ISBN13 9788936803933
ISBN10 893680393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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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0월 15일 아침, 파리 교외 반센느 둑

말뚝 위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던 새는 갑자기 나타난 인간들 때문에 멀리 날아갔다. 새벽을 채웠던 안개들도 희미한 흔적만을 남겨놓고 사라져버렸다. 충만한 빛이 듬성듬성 나무들이 서 있는 산사면과 그 아래 벌판에 내리쬐었지만 그 안을 걸어가는 인간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가운데가 솟아오른 아드리안 헬멧을 쓰고 푸른 코트를 입은 열두 명의 병사들이 나란히 섰다. 콧수염을 기른 헌병대 부사관 두 명이 한 여인을 끌고 나왔다.
나란히 선 병사들 사이에서 나지막하게 마타 하리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전선의 병사들에게 요염한 마타 하리의 사진엽서는 최고의 인기였다. 병사들 앞에 선 마타 하리는 늙고 지쳐 보였다. 그녀를 처형대로 쓰는 말뚝 앞에 세운 부사관들이 코트 주머니에서 밧줄과 눈을 가릴 검은 천을 꺼냈다.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그녀가 짧게 말했다.
“내게 손대지 말아요. 그리고 그건 필요 없어요.”
잠시 주저하던 부사관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는 뒤로 물러섰다. ‘앞에 총’이라는 구령과 함께 나란히 서 있던 병사들이 총을 들어올렸다. 그녀는 잠깐의 공백에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2월 17일 프랑스 정보부에 체포된 이후 처음 느껴본 편안함이었다.
“내가 잘못한 걸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묻고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독했던 가난 그리고 그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억지로 했던 첫 번째 결혼이 섬광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져갔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뒤로 하고 파리로 왔지만 무일푼 신세였다. 아무것도 없던 그녀가 뭘 할 수 있었을까?
‘겨눠 총’이라는 메마른 구령과 함께 열두 개의 총구가 보였다. 이제 아주 잠깐의 시간 밖에는 없었다. 놀이 공원의 회전목마처럼 과거가 번쩍거렸다. 고귀한 귀족과 왕족들과 지냈고, 잘생긴 장교들이 번갈아 가면서 구애를 했다. 그녀는 입술을 모으고 소리 없이 웃었다. 그녀가 다시 숨을 내쉬는 순간 헌병대 부사관이 마지막 구령을 뱉었다.
“발사!”
열두 번의 총성이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말뚝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하늘을 빙빙 돌던 새가 총성에 놀라 산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그녀는 가슴을 베어내는 것 같은 거대한 통증에 무릎을 꿇었다. 깜빡거리던 눈꺼풀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세상과의 마지막 끈을 놓쳐버린 그녀의 육체가 옆으로 쓰러졌다. 리볼버 권총을 뽑아든 헌병대 부사관 한 명이 허리를 굽히고 그녀의 시신을 내려다봤다.
시신을 확인한 부사관이 죽었다는 손짓을 했다. 해부용 시신을 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파리 제3병원 소속 앰뷸런스가 그녀의 시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 PP.208-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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