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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마을

오래된 마을

: 김용택 산문집

리뷰 총점8.9 리뷰 18건 | 판매지수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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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4월 27일
쪽수, 무게, 크기 240쪽 | 348g | 150*210*20mm
ISBN13 9788984313293
ISBN10 8984313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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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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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녘에 바람이 불 때 앞산의 나무들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나무들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장관이었어요. 잎들이 하얗게 뒤집어지는 앞산을 보고 나는 감동했습니다. 참나무 잎이 뒤집어지면 사나흘 뒤에 비가 오지요. 감동 잘 하는 내가 홀로 감동을 하려니 조금 벅찹니다. --- p.44

못자리를 할 때 볍씨를 뿌리고 그 위에 비닐을 덮어둡니다. 비닐을 덮고 바람에 날리지 못하게 비닐 자락에 1미터 간격으로 흙을 한 삽씩 떠서 얹어두지요. 그런데 벼들이, 그 연하고 여린 벼 잎이 올라오면서 비닐이 점점 들어 올려져요. 정말 놀랍습니다. 그 가늘고 가는, 그리고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이는 여린 벼 잎들이 힘을 합쳐 흙을 누르고 있는 그 무거운 비닐을 들어 올리며 싹을 키우는 것이지요. 놀랍지요. 신기하지요. 무심하게 볼 일이 아닙니다. --- p.51

슬레이트 지붕은 옛날에 이은 그대로여서 이제는 다 낡고 색이 바랠대로 바래서 우중충한 게, 영 나간 집 같습니다. 전지를 했는데도 탱자나무가 자라서 지금은 그 집 마당이 잘 보이질 않습니다. 어느 날은 그 집 마당 빨랫줄에 팬티 하나, 몸빼 하나, 오래된 윗옷이 하나 걸려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긴 빨랫줄의 빨래를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눈물이 나왔답니다. 혼자 울었지요. 울먹였답니다. 빨랫줄이 너무 길어서 그냥,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살다 보면 어쩔 때, 그럴 때가 있잖아요. --- p.59

아버지는 꼭 소 목에 핑경(워낭)을 달아주었는데, 그 수소의 핑경 소리는 늘 고르고 평화로웠습니다. 소 목에 걸린 핑경 소리를 듣고 우리는 소의 동태를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소가 우리들을 바라보던 그 정다운 눈을 잊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소가 어찌나 잘생기고 크던지 전락북도 종우 대회에 나갔지요. 대회에 나간 날 아침, 소에게 굿칠 때 두르는 울긋불긋한 굿 띠를 이리저리 보기 좋게 둘러 장식을 했지요. 굿 띠를 두른 소가 외양간을 빠져 나올 때 동네 사람들은 모두 탄복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 소가 전라북도 종우 대회에서 2등을 해왔습니다. 금테 두른 아주 근사한 상장과 금일봉을 탔지요. 아버지 생전 처음 받은 상장을 나는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 p.68

지금 아파트 건물이 들어선 도시의 곳곳이 옛날에 논이나 밭이 아니었는지, 벼가 자라고 보리가 자라고 복사꽃과 살구꽃이 피는 과수원은 아니었는지, 시냇물만 복원할 게 아니라 우리들이 살고 있는 도시의 한복판에 논이나 밭도 얼마쯤 복원해보면 어떨지, 사람들이 공원에서 나무나 집이나 물만 볼 게 아니라 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의 손이나 땅을 파는 호미질 소리나 괭이질 소리나 삽질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은 어떨지, 허리 굽혀 땅을 파는 사람들 손끝에서 자란 곡식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어떨지, 나는 그런 아주 ‘생태 순환적’이고 ‘친환경 농업적인’ 생각을 한번 해보았습니다. 시장이 어디를 가다가 논에 풀이 있으면 구두를 벗고 들어가 풀을 뽑고, 장다리꽃 피는 보리밭에 들어가 쭈그려 앉아 지심을 매고 있는 모습은 시민들에게 얼마나 든든해 보일까요. 그런 생각을 한번 해보았습니다. --- p.76

“말도 마라.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로 시작되는 저분들의 일제식민지와 배고픔과 6.25전쟁 속에서 살아온 일상을 우리가 어찌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아무 힘없는 사람들이 겪어왔을 역사적인 격동과 격변의 그 모진 세상 세월을 누가 다 말로 하고 글로 쓰겠습니까. 어떤 역사도 이념도 어떤 주의도 저분들의 편이 되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분들은 그냥 다 견디고 살아왔지요. (중략)
우리가 사는 세계는 지금 낡은 것들을 벗어던지며 저만큼 성큼성큼 앞서가고 있는데, 아직도 시대착오적인 냉전적 사고방식으로 낡은 나라의 틀을 고수하며 우왕좌왕 허둥대는 우리들의 모습이 참으로 누추하고 초라해 보입니다. 이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은 도대체 지금 저 할머니들 앞에서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 p.98

같이 먹고 일하고 같이 놀았던 동네 사람들은 일을 할 때도 가만히 보면 참으로 신기하게도 모두 쓸모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내기할 때, 집을 지으며 지붕에 흙을 얹을 때, 명절날 굿을 칠 때, 동네 사람 모두가 쓸모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쟁기질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지게를 잘 만들고, 모내기철이나 바쁠 때는 주전자 들 힘만 있으면 아이들도 모두 집안일과 동네일에 힘을 보탰습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은 정자나무 티에 앉아 물가에서 노는 아이들을 지켰습니다. 정말 마을은 완전고용이 저절로 이루어진 사회였던 것입니다. --- p.104

참 빠른 세월이지요. 꽃이 피는 살구나무 아래 앉아 문득 고개 들었더니 서른이었고, 살구나무 아래 앉욾 아이들이랑 살구 줍다가 일어섰더니 마흔이었고, 날리는 꽃잎을 줍던 아이들 웃음소리에 뒤돌아보았더니 쉰이었습니다. 학교를 떠나며 묵묵히 나를 바라보는 살구나무를 바라다보니, 어느새 내 나이 머리 허연 예순입니다. 스물다섯인가 여섯 무렵 나는 여기서 아이들과 환갑이 될 때까지 살기로 다짐을 했지요. 그런 삶도 그런 인생도 아름다울 수 있겠다는 아주 소박한 생각을 했었지요. 마침내 그렇게 되었습니다. 살구나무랑 아이들이랑 나랑 참 잘 살았지요. 그 나무 아래에서 어린아이들이 지금도 놀고 있습니다. 저 아이들이 나였지요. --- p.128

사람만이 희망이라고들 말하지 마세요. 이 땅은 사람만 사는 게 아니니까요. 나는 이따금 사람이 없는 지구를 상상하곤 합니다. 저 산의 나무 한 그루, 길가의 강아지풀잎 하나, 창공을 나는 새 한 마리, 배추잎에 붙은 벌레 한 마리가 다 사람만의 것이 아닙니다. 닭이 울고 새가 울고 꽃이 피고 농부들이 모를 내고 거두는 일이 우리들에게 생명을 나누어주는 일이지요. 해가 질 때면 산그늘을 밟고 강 길을 걷습니다. 서쪽 강 언덕에는 눈부신 억새들이 하얀 손이 되어 우릴 부릅니다. 샛노란 벼들이 익어가는 저분 들녘의 발광하는 가을 햇살을 봅니다. --- p.158

오늘은 새벽 논길, 강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둘이 마주앉아 아침밥을 먹습니다. 어머니께서 손이 좀 우선하냐고 묻습니다. 뭐든 몰아붙이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쉬엄쉬엄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른팔이 아플 때 왼팔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한 팔이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아파버리면 다른 한 팔이 무사할 리 없지요. 두 팔이 다 아파 두 팔을 다 못 쓰면 그땐 어떡합니까.
좌 니우니 하는 말들이 ‘좌우지간’에 싫습니다. 정말 식상해요. 낡았어요. 좌우지간 성가셔요. 좌우를 가를 것만 있고 온몸을 생각할 정상적인 생각이 우리에겐 왜 없습니까. 감도 해를 갈아가며 열고, 나뭇잎들도 해갈이를 합니다. 한 달이 크면 한 달이 작고,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올 때가 있지요. 세상에는 늘 그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할 ‘때’입니다. --- p.158

이렇게 눈 줄 데 없이 천지간에 봄꽃들이 피어나면 어머님은 꽃들을 바라보며 “꽃만 피면 뭐 헌다냐. 사람이 있어야지.” 하셨지요. 그러면 저는 “봄날에 저렇게 꽃이라도 펴야지요, 어머니.”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올 봄 나는 어머니에게 ‘꽃이라도’라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꽃만 피면 뭐 한답니까. (중략)
꽃 피고 새 우는 이 좋은 봄날, 나는 여러분에게 꽃피어 좋다는 소식을 전하지 못합니다. 우리 농민들에게 지금 저 꽃들은 꽃이 아닙니다. 서러움입니다. --- p.224

만원버스를 탔을 때 어떤 사람은 자리에 앉으려고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그냥 조금 불편하더라도 서서 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냥 서서 가기로 했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가야겠다고 한 사람은 자리만 보이기 때문에 자리에 앉은 사람이 미워질 것입니다. 집에 갈 때까지 자리만 보이겠지요. 아니, 자리를 찾다가 자기가 내려야 할 곳을 놓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일찍 자리에 앉아 갈 생각을 버렸으므로 내 앞에 앉은 사람들이 자세히 보였습니다. 자세히 보면 이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지요. 더 자세히 보면 세상의 길이 보이고, 옳고 그른 것이 보입니다. 내 눈에는 창밖의 나무와 산과 꽃과 새가,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자세히 보였습니다. 너무 자세히 보다 보니, 수많은 생각들이 일어나서 그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그게 내 인생이 되고 글이 되었던 셈이지요.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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