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메뉴
주요메뉴


닫기
사이즈 비교
소득공제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리뷰 총점7.6 리뷰 12건
정가
11,000
판매가
9,900 (10% 할인)
구매 시 참고사항
eBook이 출간되면 알려드립니다. eBook 출간 알림 신청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5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236쪽 | 471g | 166*217*20mm
ISBN13 9788943103583
ISBN10 8943103581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그림 : 송영방
호는 우현. 1936년 경기 화성에서 출생하여 1960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국전에서 9회에 걸쳐 특선을 수상했으며, 1974년 국전 추천 작가로 선정됐으며, 이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49세의 나이에(1984) 첫 개인전을 가진 이후 세 번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1972년 인도 트리엔날레 출품 이후 국내외서 수십 차례의 초대전에 참가했다. 현재 동국대 예술대 학장을 역임하고 있다. 송영방은 산수화, 인물 및 화조에도 능할 뿐 아니라 누드화, 불화, 삽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골고루 편력하고 있다.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1부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어린 시절 이야기

4학년을 마치고 여름 방학이 되자 나는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여름 방학 동안 동네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을 상대로 한글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내가 계획을 세웠다기보다 “여러분들은 여름 방학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문맹퇴치 운동을 하라”는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충실히 실행에 옮겼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한글 강습을 하겠다는 내 말을 듣고 해방 직후부터 구장 일을 보던 삼촌은 큰 당숙에게 부탁을 해서 우리 동네에서 가장 넓은 당숙네 사랑방을 강의실로 쓰게 해 주었다. 십수 년 전 야학 때 쓰던 흑판이 광 속에서 꺼내어져 내걸렸다. 나보다도 삼촌이 더 열성이어서 분필은 말할 것도 없고, 공부할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말똥종이 공책과 연필까지도 미리 준비했다. --- pp.49~50, 「어느 방학 ‘학생 선생’의 한글 강습」 중에서

그 무렵 내게는 좋지 못한 버릇이 생겼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서 주무시는 날이면 마루고 방이고 아무 데나 웃옷을 벗어 놓는데, 호주머니를 뒤져 보면 으레 구겨진 지전 몇 장이 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그것을 훔쳤고 아버지는 눈치를 채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늘 용돈이 넉넉했다. 이렇게 훔친 돈은 책이나 학용품을 사는 데 쓰이기도 했지만 더 많이는 군것질하는 데 들어갔다. 교문 앞에는 무싯날에도 지글지글 끓는 철판에 즉석에서 설탕물을 부어 온갖 모양의 사탕과자를 만들어 파는 장사가 있어서, 방과 후면 나는 볼일이 없어도 늘 교문 앞을 지나서 집으로 왔다. --- p.84, 「호주머니털이의 ‘공부도 좋지만 몸이 튼튼해야지’」 중에서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다. 행선지는 겨우 도청 소재지인 청주였다. (…) 마침 청주에서는 전국박람회가 열렸고 그에 맞추어 전도 초등학생의 미술과 문예작품 전시회도 있어, 청주를 행선지로 정하는 데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 나도 수학여행이 결정되기 이전에 이미 우리 학교를 대표해서 시를 써서 제출해 놓고 있었는데, 산문에는 같은 반 다른 아이의 글이 뽑혀서 제출되어 있었다. (…) 그때 수학여행에서 나는 네온사인이며 불빛으로 대낮처럼 환하던 밤거리와 북적대던 사람들을 보았다는 기억밖에는 없다.
도시에 취해 너무 정신이 없었으므로 나는 전시장을 돌면서도 내 시가 거기 전시돼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물론 보지도 못했다. 한데 마지막 밤, 도 학무과에 다닌다는 담임의 친구가 찾아와 말했다. “자네네 학교에서 당선작이 나온 거 모르나!” 담임은 당장 나를 불러 그에게 인사를 시키고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칭찬했다. 그 당선자가 나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다음날 새벽차를 타야 했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우리는 수학여행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마을의 영웅이 되었다. 내가 지나가면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한 번 더 나를 쳐다보았으며, 내 등 뒤에서 수군수군 내 얘기들을 했다. 집에서들은 더 말할 것도 없어, 이제 정식으로 통지가 오면 잔치를 벌인다고 벼르고 있는 판이었다.
그렇게 구름에 둥둥 떠다니는 것같이 며칠을 보내고서였다. 아침 조회시간에 교장이 우리 학교에서 작문에 입상자가 나와 큰 영광이라는 말을 길게 늘어놓은 다음 상 받을 학생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그것이 내 이름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너무 긴장해서 잘못 들었나 해서 담임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그는 나한테는 외면을 한 채 산문을 써 보낸 아이더러 어서 나가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나는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그 아이가 상장을 받아들고 절을 한 다음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 pp.98~103, 「시시한 줄반장에, 문예당선은 김칫국만!」중에서

나도 어려서 허풍깨나 쳤던 것 같다. 잊혀지지 않는 허풍으로는 먼저 삼촌에 관한 것이 있다. (…) 내가 결정적으로 허풍선이 소리를 듣게 된 것은 외삼촌에 관계되는 거짓말 탓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와 내가 외갓집을 다녀온 뒤 작은외삼촌이 다니러 온 일이 있는데, 아이들이 너희 외삼촌 무엇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귓결에 고등고시를 공부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을 바탕으로, 판사를 하고 있다고 허풍을 쳤다. 이 말이 담임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은 우리 주위에 판사 같은 높은 직위의 사람을 친척으로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담임이 “너의 외삼촌이 판사라고?” 하고 아이들 앞에서 확인했을 때 나는 거짓말한 것을 후회했지만, 일단 나간 말을 거두어들일 수는 없었다. “예” 하는 내 대답은 아마 목구멍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소리였을 것이다. 마침내 이 말은 아버지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어느 날 아버지는 “네가 선생님한테 외삼촌이 판사라고 거짓말했냐!” 하고 다그쳤고, 그날 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외탁을 했느니 친탁을 했느니, 티격태격 싸웠다. 자기 집안에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없는데 저런 아이가 태어난 것을 보면 자기 집안 내력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 서로의 주장이었다. --- pp.104~106, 「허풍깨나 치던 바늘도둑 시절에」 중에서

2부 삶의 뒤안길에서

“오늘은 틀림없이 취직이 된단 말이야”하고 택시 안에서 그는 장담을 했고 그 취직할 곳이 바로 문화예술단체의 집합체인 예총이라고 설명을 했다. (…)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예총 사무실로 올라간 그는 대뜸 이사장을 찾았고, 이미 교분이 있었던지 이사장은 반갑게 이사장실로 우리를 맞아들였다. 한데 이사장실로 들어간 김 시인은 응접석에 앉는 것이 아니라 이사장석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첫마디가 이러했다. “이사장, 오늘부터는 내가 이사장을 할 테니까 당신은 이제 그만두시오.” 당시 이사장은 연극 연출을 하는 박진씨였다.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을 것이다. “벌써 취했구먼. 김형 나가서 술 한 잔 합시다”하고 가볍게 받자, 그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내가 비싼 돈 주고 택시 타고 와서 농담이나 하는 사람인 줄 아시오! 내가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당장 그만두시오. 그리고 사무국장 들어오라고 그러시오.” 시끄러우니까 사무국장은 무슨 일인가 해서 이미 들어와 있었다. “제가 사무국장인데요” 하니까 이번에는 그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사무국장도 당장 해고야!” 그리고는 나를 향해 “어이, 신경림, 너를 오늘부로 사무국장으로 임명한다!” --- pp.137~138, 「병석에 누워 있는 김관식 시인을 찾아간 서정주 시인」 중에서

천상병이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것도 거의 같은 무렵이었던 것 같다. (…) 이 사건에 천상병이 연루된 연유는 간단하다. 그의 서울상대 동기에 강모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무렵 유학을 마치고 와서 모교의 전임으로 있었는데, 그 역시 천상병이 가끔 찾아가, 그의 표현에 따르건대 술을 뺏어먹는 상대였다. 천상병을 특별히 좋아하고 믿어서 그 앞에서 숨기는 것이 없는 그는 어느날 술자리에서 동베를린에 갔던 자랑을 했다. “그거 국가보안법에 안 걸리나!” 천상병의 말은 겁주자는 것이 아니라 농담이었다. 듣고보니 이 순진한 간첩(?) 강모는 걱정이 되어, 혹 알아볼 데가 있으면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마침 천상병의 친한 친구 중에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는 사람이 있었다. 홍은동 산 1번지 김관식이 무단점거한 시유지를 얻어 집을 짓고 사는 이규헌이 바로 그였다. 어느날 천상병이 술자리에서 진지하게 물었다. “서독 유학생들은 동베를린도 갔다 오고 칸다 카더라. 그거 괜찮나?” 정보부라고는 하나 거기서 나오는 기관지를 만들고 있던 얼치기 정보부원 이규헌은 간단히 대답했다. “무슨 일 있어! 아무 상관 없다! 우리니까 남북이 못 다니지 독일은 다르다.”
“그거 틀림없지!” 하고 다짐하던 그 자리에는 마침 나도 있어, “야, 그게 무슨 문제야, 아무 문제 없다니까!” 하던 이규헌의 말을 나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이 말을 천상병은 그대로 강모에게 전했고, 잡혀들어간 강모는 자기가 동베를린 갔다 온 것을 기관에서 알고도 문제삼지 않았음을 강조했다. 말하자면 천상병을 매개로 한 기관원을 통해서 동베를린을 다녀왔음을 기관에 미리 신고한 형태가 된 것이다. 천상병이 잡혀가고 이어 이규헌이 잡혀갔다. 이 사건을 나는 신문에 발표되기 이전에 알았으니, 그것은 며칠동안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돌아온 이규헌을 통해서였다. 이규헌은 무능한 정보부원으로 판명되어 파면이 되었고, 홍은동에는 실업자가 하나 더 늘게 되었는데, 이규헌은 동료로부터 조사를 받고 나서야 천상병에게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은 생각이 어렴풋이 들더라고 했다. 말을 더듬는 그는 얼뜨기로 취급되는 바람에 그래도 파면으로 끝났지만, 천상병은 불고지죄가 인정되어 석달 넘게 갇혀 있다가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로 나왔다.
천상병은 글도 잘 쓰지만 말도 잘하고 재치와 유머가 넘쳐 남한테 얻어먹는 술자리에서도 늘 주인 행세를 했다. (…) 그러나 감옥을 살고 나온 뒤로 그는 사람이 달라졌다. 술은 여전했으나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었다. (…) 한동안 사라졌다가 거의 폐인이 다 되어 나타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지만, 모진 전기고문 탓으로 생식불능이 되었다는 사실을 그로부터 직접 들은 것은 20년이 더 지나서였다. --- pp.156~159, 「동백림 사건 때 모진 고문으로 폐인이 된 천상병 시인」 중에서

1980년 5월,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당국에서 마구잡이로 사람을 잡아들이던 날이다. 집을 빠져 나온 나는 돌아다니다가 갈 곳이 없어 결국 조태일의 인쇄소를 찾아갔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문을 닫아걸고 인쇄소에 들어앉아 있었다. 나를 보자 그는 지옥에서 부처님이나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역시 궁리가 서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서울을 빠져 나가기로 하고 예산으로 향했다. (…) 며칠 있다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어영부영하다가 합동수사본부에 잡혀가 보니, 그가 먼저 잡혀와 있었다. “잘 잡혀 온 거예요. 지금 밖에 있으면 뭐해요!” 그가 내게 한 첫 마디였다. (…) 1주일 여 조사를 받고 구속되어 종로경찰서로 넘어올 때는 함께 수갑을 찼다. “이거, 고목에 매미가 붙은 거여, 코끼리하고 생쥐가 한 끄나풀에 묶인 거여!” 종로서에 가니 심심했던지 형사들이 한 마디씩 했다. 조태일은 같은 수갑에 묶인 손을 크게 저어 나를 뒤뚱대게 했고, 여기가 어디라고 장난질이냐며 형사들은 호통을 쳤다.
보름 동안의 유치장 생활도 함께했고, 구치소로 넘어갈 때도 같은 수갑을 찼다. 우리보다 2, 3일 늦게 잡혀온 구중서(문학평론가)가 혼자 차도 괜찮다며 함께 차기를 양보했기 때문이다. 구속한 검찰관조차 우리가 왜 구속되었는지를 몰라, 아마도 문단에서 몇 사람 뽑아서 비례대표로 구속한 것 같다고 짐작한 이 사건에서 나와 구중서는 한 달 만에 기소유예로 나왔지만, 조태일은 한 달을 더 살았다. 광주 태생인 만큼 김대중씨와 어떤 커넥션이 없나 해서 차별을 받은 것이다. “나는 도저히 감옥하고는 체질이 안 맞는다고 했더니 그 말도 일리 있다고 내 준 거라고요.” 공소기각으로 나온 그는 이렇게 또 한 번 싱거운 소리를 했다. --- pp.194~196, 「겉모습과는 달리 세심하고 정이 많은 조태일 시인」 중에서

나는 이문구를 한국문인협회 기관지 월간문학의 편집자 정도로밖에 모르고 있었던 터다. 만난 일도 없어, ‘암소’를 읽은 며칠 뒤에는 엉뚱한 사람한테 당신의 ‘암소’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했다가, 그건 제가 쓴 것이 아니고 이문구라는 젊은 작가가 쓴 것이라는 자세한 설명을 듣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이문구와 알고 지내게 된 것도 ‘창비’에 시를 발표하고서였던 것 같다. 그러나 처음부터 내가 그를 좋게 본 것은 아니었다. 우선 삼선 개헌이며 유신체제 등 군사정권에서 하는 일이면 덮어놓고 앞장서서 지지하고 나서는 문협(한국문인협회)의 이사장이던 김동리 선생에 대한 맹목적인 의리가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반체제적이고 공격적인 시를 쓰는 조태일조차 그를 좋아한다는 것 자체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조태일로부터 이문구의 사람됨에 대한 다음 같은 얘기를 들은 뒤부터 그를 달리 보게 되었다. 김지하 시인이 ‘오적’ 사건으로 구속되어 있을 때였다. 젊은 작가들 몇이 모여 데모를 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처음 이문구는 극구 반대했다. 다 잡혀 가고 끌려 갈 걸 뻔히 알면서 그 짓을 왜 하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기로 결정이 나자 이문구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피켓을 만들고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마침내 거사일이 되었다. 조태일은 막상 겁이 나서 한 30분쯤 늦게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내심 데모가 끝났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한데 현장에는 이문구 혼자만이 피켓과 플래카드를 싸들고 나와 서 있더라는 것이다. (…) 70년대 중엽 진보적인 문인들이 표현의 자유를 위해 자유실천 문인협의회를 만들었을 때 처음에는 글쟁이가 글을 써야지 무슨 단체를 만드느냐고 탐탁해하지 않던 그였지만, 일단 만들어진 뒤에는 조태일, 박태순 등과 더불어 내내 가장 적극적이고 열성적으로 집회며 시위를 주도했다. --- pp.213~215, 「겉모습과는 달리 세심하고 정이 많은 조태일 시인」 중에서

창비를 시작으로 2, 3년 사이에 이곳저곳에 3, 40편의 시를 발표하고 나니까, 주위에서 이제 시집을 묶을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얘기들을 했다. 나라고 시집을 내고 싶은 마음이 없을 리 없었지만, 신인이나 다름없는 무명인 내게 시집을 내준다는 데가 있을 턱이 없었다. 시집을 장사로 출판하는 데는 거의 없던 시절이다. 그래도 출판사에서 체면상 인세를 주고 시집을 내주는 시인은 아마도 서정주나 김광섭 등 몇 원로 시인과 청록파 시인 정도요, 대개가 자비출판이었다. (…) 시집을 낸다면 도리없이 자비출판일 수밖에 없는데, 나는 영 그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같은 출판사에서 제작을 맡고 있던 서정춘 시인의 격려와 압박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농무’를 자비로 출판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책을 내자면 출판사 명의가 필요했는데 그것도 문제였다. (…) 창비는 아직 출판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았다. 내 고민을 알고 이문구는 그가 근무하는 월간문학사 이름을 선선히 빌려 주어 결국 ‘농무’는 월간문학사 이름으로 나오게 되었지만, 그곳 역시 출판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책이 나온 뒤에야 알았다. 이문구는 어차피 불법 출판물이 될 터인데 무슨 상관쳀냐고 희떱게 눙쳤지만, 그 자신도 정기간행물 등록과 출판 등록을 구별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 pp.224~225, 「『월간문학』사 이름으로 나온 첫 시집 『농무』」 중에서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회원리뷰 (11건) 회원리뷰 이동

한줄평 (1건) 한줄평 이동

총 평점 10.0점 10.0 / 10.0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배송 구분 예스24 배송
  •  배송비 : 2,500원
포장 안내

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반품/교환 안내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반품/교환 방법
  •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  모바일 쿠폰의 경우 유효기간(발행 후 1년) 내 등록하지 않은 상품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직수입 음반/영상물/기프트 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 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30%를 부과할 수 있음

    단, 당일 00시~13시 사이의 주문은 취소 수수료 면제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모바일 쿠폰 등록 후 취소/환불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LP상품의 재생 불량 원인이 기기의 사양 및 문제인 경우 (All-in-One 일체형 일부 보급형 오디오 모델 사용 등)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 품절 상태입니다.
뒤로 앞으로 맨위로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