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세계가 하나」인 지구촌 시대에 살고 있다. 현재의 이 지구촌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삶의 논리의 세 축은, ‘기술과 과학’,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서구적 이성의 산물이다. 이 이성의 찬란한 만개로 「현대인들」은 부족함을 모르는 풍족함 속에서 소비가 미덕이라고 외치며 살고 있다. 그렇지만 현대 선진국 시민들의 이러한 풍요로운 일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그늘에서의 희생이 전제되고 있다. 그들의 평화로운 일상은 못 사는 제삼세계 빈민들의 눈물과 반항하지 않는 듯 보이는 자연의 착취 속에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갈수록 부익부빈익빈의 추세 속에 빈부의 격차는 심해지고 자연의 황폐화도 가속화되고 있다.
서구적 이성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는 이 지구촌은 많은 문제를 배태하고 있다. 그래서 서구의 많은 지성인들도 이성을 새롭게, 좀 더 폭넓게 규정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이성’ 또는 ‘합리성’하면 아주 좁게 과학적 또는 이론적 합리성만을 생각했다. 칸트가 이성을 이론적 이성, 실천적 이성, 미적 이성으로 세분화해서 논의했지만 실증주의와 과학주의의 영향 아래 이론적 이성만이 참다운 합리성으로 간주되고 다른 두 이성은 합리성에서 배제되기에 이른다. 그러다 보니 윤리 도덕, 종교와 예술 등이 합리성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순전한 주관적 느낌의 영역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런 협소해진 이성의 위상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20세기 들어서서 하이데거를 비롯해서 하버마스 등을 통해 시작되었다. 하버마스(J. Habermas)는 칸트의 세 가지 이성을 다 포괄하고 함축하는 넓은 의미의 이성을 제안하며 그것을 ‘의사소통적 이성[합리성]’이라고 이름했다. 그러면서 그것이 실존세계, 사회세계, 사물세계의 배경과 태반이 되는 생활세계를 형성해나가며 문화와 사회 그리고 인격[인성]을 이루게 하는 근본이라는 의미에서 ‘생활세계적 이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벨쉬(Wolfgang Welsch)라는 철학자는 그의 방대한 『이성』이라는 대작에서 이성을 ‘가로지르기[횡단적] 이성(transversal Vernunft)’이라고 이름한다. 그는 이성이 다양한 영역과 문화권들을 가로질러 옮겨다니며 옮김[이행]의 활동을 하는 것에 착안하여 그렇게 명명했다. 서로 다른 다양한 역사와 전통, 문화권들이 서로 얽혀 하나의 지구촌 시대를 이루며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다른 문화와 세계를 이해하게 만들어주는 ‘권역 가로지르기’에서 이성의 독특한 역할을 본 것이다.
어쨌거나 유럽의 지성인들 스스로가 서구적인 이성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인정하며 21세기 인류가 하나의 지구 위에서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이성」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 서구인들이 간과해온 새로운 차원이 보완된 그런 이성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서구의 지성인들은 「새로운 정신성, 새로운 영성, 새로운 종교성」이라는 표제어로 명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진정 지구인들이 「하나의 세계」를 힘 있는 자들의 소유와 착취라는 지배의 논리가 아닌 새로운 논리에 의해 함께 꾸려갈 생각이라면, 서구인들은 자신들과는 다른 생활세계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그 다른 생활세계와 문화전통 속에는 다른 「생활세계적 이성」이 형성 · 유지되어 왔음을 수긍하고 거기에서도 배우려는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져야 한다. 한국인의 생활세계와 문화 속에서 형성 · 유지되어온 「생활세계적 이성」은 어떤 모습이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한국인의 삶의 논리 또는 문법이, 끝이 없는 욕망과 무한한 경쟁 속에서 남을 착취하고 지구를 피폐화시키고 있는 세기말의 병리적인 증상을 치료할 수 있는 대안적 삶의 방식을 마련해 줄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가?
지금 지구촌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이성은 강하고 능력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우승열패의 생존경쟁적 이성이 아니다. 잘나고 똑똑한 자들이 못난이들을 설득하고 포섭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을 자기 식으로 대중적[보편적]으로 주도해나가는 목적합리적 합리성이나 의사소통적 이성도 아니다. 힘없고 빽 없어서 고통과 고난 속에서 한(恨)을 품고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약한 자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삶을 보는 그런 이성이며 합리성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서로 사이좋게 어울려 서로 살고-살리는 그런 공생과 상생의 이성이다. 그 실마리를 우리는 우리의 생활세계에서, 우리의 삶의 문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사이놓기 이성」이라 이름할 수 있다.
지구촌 시대인 현대는 또한 「문화의 세기」라고도 불린다.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우선 순위에서 항상 뒷자리를 차지하던 「문화」가 중요한 핵심 요소로 등장했다. 이제는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부각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관용, 여유, 배려, 창의성, 독자성 등이 키워드로 대두되면서 예술과 종교가 인간의 문화적 삶을 각인하는 분야로 관심의 한가운데 놓이게 된다. 아울러 문화의 다양성이 중요한 관심사로 부각된다. 생물종의 다양성이 지속가능한 지구 생태계를 위한 필수조건이듯이 문화의 다양성이 평화로운 인류의 공존을 위한 기본조건이다. 우리는 다양한 문화권에서 전수되어 내려오는 수많은 문화자산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서 보다 나은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분야에서 통합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문화의 세기가 요구하고 있는 문화적인 태도는 유연성 있는 통합적인 대처방식이다. 넓은 의미의 문화영역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삶의 방식이 곧 문화다. 정치도 중요하고 경제도 중요하고, 과학과 기술도 중요하다. 거기에 덧붙여 철학, 예술, 종교도 중요하다. 문화적인 자세는 이러한 인간의 다양한 분야들을 어느 한 분야로 축소 또는 환원시켜서 획일화된 논리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을 거부한다. 과거 ‘제일철학’의 자리에 이제 ‘통합학문’이 들어선다. 모든 개별적인 분야에서의 통합적인 시각과 그에 맞갖은 통합학문이 필요할 뿐 아니라 이 모든 개별 분야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전체에 대해서도 통합적인 시각과 통합학문이 요구된다. 인간, 자연/우주, 신에 대한 통합적인 시각과 통합학문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통합적인 시각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분야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문화콘텐츠학」의 분야다.
지은이는 문화콘텐츠를 이런 통합적인 시각에서 접근하기 위해 『콘텐츠와 문화철학. 문화의 발전단계와 콘텐츠』(북코리아, 2009)에서 ‘문화’를 우주발생적인 차원까지 거슬러 올라가 우주진화의 한 양태로 고찰하였다. 그리고 문화의 발전단계에서 문화콘텐츠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어떤 역할을 띠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끝으로 21세기 한국 문화 르네상스의 가능성을 구체적인 문화활동에서 확인하며 세계 속에 한국 문화를 어떻게 꽃피워야 하는지를 간략하게 점검하였다.
이 책 『지구촌 시대와 문화콘텐츠. 한국 문화의 지구화 가능성 탐색』은 위의 책 『콘텐츠와 문화철학』의 후속편이다. 여기에서는 현재의 시대상황을 문화의 시각으로 진단하고 한국 문화 또는 한국의 생활세계에 바탕한 문화콘텐츠가 지구인의 문화적 문제제기와 문화입맛에 어떻게 기여할 있는지 그 가능성을 모색해본다.
여기서 지은이는 「문화콘텐츠(Cultural Content)」를 유네스코의 제안에 따라 “문화적 정체성에서 비롯되거나 이를 표현하는 상징적 의미, 예술적 영역, 그리고 문화적 가치”로 임시로 규정하고 출발한다. 어쨌거나 “문화콘텐츠”는 이 땅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21세기에 전개된 문화적 현상의 발로이다. 140년 전 서양의 근대화의 충격 속에서 거기에 대응하기 위한 문화의 새틀짜기로 「동도서기(東道西器)」를 제안하였다면, 21세기 지구화/정보지식화의 파고 속에 한국인은 또 한번 새로운 문화적 틀거리를 제안한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물음을 던져야 한다. 반만년이라는 긴 한국인의 문화적 숨결을 간직하고 한국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담은 한국의 문화콘텐츠가 문화의 세기에 지구촌 시민들의 문화입맛을 맞추어 줄 수 있는가?
‘문화콘텐츠’는 이 땅에서 태어난 우리의 자식이다. 거기에는 다차원적으로 한국적인 것이 짙게 배어있다. 한국의 예술, 기술, 살림살이, 세계관, 가치관, 희망이 한데 모여 지구촌 시대를 사는 현대의 한국인들로 하여금 그러한 이름을 짓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 책에서 먼저 「문화의 세기」라는 21세기 문화콘텐츠가 태동한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자. 근대와는 다른 ‘탈근대’ 또는 ‘제2근대’라는 우리의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고 출발하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서 근대를 이끌어왔던 문화 가치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것이 지니고 있는 장점과 한계를 대략적으로나마 고찰해보자. 전세계의 가치관으로 통용되고 있는 자유, 평등, 인권, 사회정의는 근대의 문화가치들이다. 그것이 어떤 배경에서 어떤 희망을 갖고 형성되었는지 고찰하고 그것이 드리우고 있는 그늘은 무엇인지 분석해본다.
그 다음 근대의 가치관을 비판하며 21세기 새로운 문화의 전략을 짜는 시도들로는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여기에 다른 문화권인 동아시아 내지 한국의 가치관이 들어설 여지는 있는지 알아본다. 이들 새로운 문화의 새틀짜기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들은 무엇인지 규명한다.
그런 다음 문화의 세기인 지구촌 시대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해보며 문화콘텐츠의 개념을 풀쳀해본다. 문화다원주의 시대인 지구촌 시대가 지향해야 할 삶의 비전을 살펴보며 ‘문화’의 구실을 정리해본다. 문화의 세기, 문화 시민, 생명문화공동체 등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들을 풀어보인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분석을 바탕에 깔고 한국인의 문화가치가 지구촌 시대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궁구해본다. 그러기 위해서 근대화의 파고 속에 한국인들은 문화적으로 어떻게 대응해 왔는지를 알아본다. 반만년의 문화전통을 어떤 식으로 견지하며 새로운 문화 정체성을 형성하려고 노력했는지 살펴본다.
그런 뒤 문화콘텐츠가 등장한 21세기 지구화의 추세와 한반도의 상황을 점검해본다. 문화콘텐츠가 어떤 시대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는지 조사해 본다. 지구지역화라는 시대적인 추세 속에서 한류를 해석하며 갈 길을 모색해본다. 한국인의 문화정체성을 담은 새로운 문화가치를 창출해내기 위해서 먼저 한국인의 바탈을 조사해본다. 전체와 개인을 통전(統全)하는 ‘한’ 사상 속에 담겨 있는 관계론적/그물망적 세계관을 분석하며 그 속에서 형성되어온 한국인의 독특한 정서를 표출해본다.
그 다음 한국인의 독특한 인간관, 신관 그리고 예술관에 담긴 문화 가치를 특징짓고 그것이 탈근대의 현대인에게 어떤 새로운 전망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한국인의 정체성과 문화가치를 담고 있는 문화콘텐츠로는 어떤 것이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그것의 지구화 가능성을 탐색해본다. 다양한 분야에서 문화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지구촌 한국 문화인을 표본으로 삼아 그들이 펼쳐보이고 있는 문화콘텐츠의 가능성을 분석한다. 한국적인 감성, 지성, 이성, 영성을 드러내보이며 세계 곳곳의 현대인들로부터 지구의 문화인이라는 찬사를 듣는 한국인들을 선별하여 그들의 문화전략을 구체적으로 궁구해본다.
--- 「들머리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