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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책

순례자의 책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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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6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80쪽 | 429g | 134*196*20mm
ISBN13 9788990024947
ISBN10 8990024943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저승에서 내가 제일 오래 머문 사람은 아니었다. 나보다 수천 년 전에 이곳에 온 소크라테스라는 그리스 철학자는 끊임없이 지껄이기만 할 뿐 책은 쓰지 못했다. 그는 책이란 믿을 수 없는 물건이며, 자신의 삶을 그 속에 담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주희라는 중국 학자는 더 난감한 상태였다. 그는 스승인 공자의 책을 3,333번이나 거듭 읽으며 한 자 한 자 토를 다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었다. 하긴 학자들 중에는 그런 이들이 꽤 많았다. 남들이 쓴 책을 읽고 토 달고 비평하느라 자기 글은 손도 못 대는 치들. 소설가들 역시 저승의 대표적인 터줏대감이었다. 카프카라는 젊은 작가는 내게 고백하기를, 끝이 다가오면 갑자기 엄습하는 불안과 회의 때문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고 했다. 소설가들 중에는 걸작을 쓰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번번이 실패하는 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에 비하면 음악가나 미술가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하지만 피카소라는 늙은이는 자신만만하게 시작했다가 부러뜨린 붓만 100개가 넘었으니 일반론으로 할 얘기는 아니었다. --- pp.20~21

이제 나는 아무 회오도 연민도 없이 내 삶을 돌이킬 수 있었다. 평범한, 지극히 평범한 삶. 그것이 내가 내게 지은 죄이며 내게 베푼 유일한 은혜임을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삶은 100년이든 1년이든, 파란만장하든 무미건조하든, 영웅적이든 비참하든, 모두 똑같은 두께의 책으로 묶인다는 것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나서 살고 죽는 것, 그것이 시작이고 끝이었다. 모든 은유를 무색케 하는. --- p.23

그런가 하면 시바 여왕의 도서관처럼 전설로 남은 도서관도 있습니다. 17세기 말경 유럽에서는 『구약』에 나오는 시바 여왕의 도서관이 아비시니아(지금의 에티오피아)에 실재한다는 소문이 퍼져 교황이 조사를 명하기도 했습니다. 솔로몬 왕이 선물한 귀중한 사본들이 소장된 이 도서관에는 에녹과 노아, 아브라함의 저서를 비롯해 1,010만 권의 책이 있다고 전해졌지요. 하지만 20세기에 아비시니아를 침략한 이탈리아 군대가 발견한 작은 왕실 도서관에는 현대 프랑스 소설 몇 권만이 꽂혀 있을 뿐이었습니다. 희귀본에 대한 갈망이 전설의 도서관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세상에 없는 도서관만이 아니라 세상에 없는 책들도 있습니다. 영국 시인 바이런의 회고록, 프란츠 카프카의 인형편지, 제임스 조이스의 『영웅 스티븐』처럼 한때 존재했으나 불쏘시개가 되어버린 원고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 pp.25~26

“도대체 내용이 어떻기에 국법으로 금하기까지 했단 말이오?”
아내가 머뭇거리며 망설이자 박주문이 다시 재촉하였다.
“패설을 읽는 것이 권장할 일은 아니지만 집안일을 다 한 뒤에 사소한 즐거움을 구한 것까지 내가 새삼 허물할 리 있겠소? 주저 말고 말해보오.”
“그러시면 내용을 간단히 말씀드리지요. 옛날 촉주 땅에 왕공이라는 고관대작이 살았는데, 죽마고우가 임종하며 어린 아들 여를 맡겼답니다. 왕공이 여를 키우는데 옥처럼 고운 용모가 날이 갈수록 빛이 나서, 남녀를 불문하고 반하지 않는 이가 없었지요. 끝내는 여가 아비라 부르며 따르던 왕공조차 그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다른 마음을 먹고, 강제로 여를 취해 남몰래 제 욕심을 취하기를 삼 년이나 하였답니다. 마침 왕공의 딸 가희가 여를 오래 사모하다가 고백하였는데, 여는 오로지 원수 갚을 생각에 가희와 관계를 맺었지요. 그리고 운우지정雲雨之情에 취하여 세속의 의리를 잊은 가희에게 그 아비의 패역을 고하니, 가희는 넋이 나가고 혼이 빠져 그 길로 아비를 죽이고 자신도 목을 찔러 죽고 말았습니다. 여는 가희가 죽은 뒤에야 그에 대한 제 마음을 깨닫고 상사곡을 지어 부른 뒤 자진하였답니다.”
박주문은 이야기에 취해 끝난 줄도 모르다가, 아내가 황황히 눈물을 씻는 것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 pp.45~46

책의 역사는 동시에 금서의 역사입니다. 책은 곧 지식이고 지식은 바로 권력이며 금서는 그를 둘러싼 투쟁의 한 표현이니, 이는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분서는 금서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서, 그만큼 권력이 큰 위협을 느꼈다는 반증이기도 하지요.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분서는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프로타고라스의 책 『신에 관하여』를 불태운 것입니다.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지요. 종교 때문에 책과 저자를 화형에 처한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알렉산드리아 대주교 테오필로스는 최고의 도서관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기독교 사원을 세웠으며, 조카 키릴로스는 광신도들을 사주해 도서관장의 딸이자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와 함께 그리스 3대 수학자로 꼽히는 히파티아를 난도질한 뒤 불태워 죽였습니다. --- p.87

깊은 혼몽에서 그를 깨운 건 눈부신 황금빛이었다. 에스파냐 정복자의 사나운 손길을 피한 단 한 권의 책, 황금으로 쓰고 황금으로 장식하고 황금으로 장정한 마야의 황금 책이 머리맡에 놓인 순간 모리스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책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애무의 대상이며,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만지는 것임을.
붉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모리스는 현기증을 느꼈다. 젖은 이끼 냄새와 마른 흙내, 선창가를 맴도는 비린내와 어린 창부의 사타구니 냄새, 바람처럼 흩어지는 로즈마리 향내가 그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체취만이 아니었다. 늙은이의 살갗처럼 서걱거리는 파피루스 책은 그를 슬프게 했고, 농염한 여인처럼 부드러운 양피지 책은 그를 달뜨게 했으며, 잉크를 흠씬 빨아들인 중국 종이책은 그를 젖게 했다. 책은 육체임을 모리스는 비로소 깨달았다. --- pp.110~111

고대 서구사회에서 책의 주재료는 파피루스였습니다. 파피루스는 잎사귀들의 끝을 맞춰서 풀칠하고 나무막대에 말아 두루마리로 만들었는데, 이것을 볼루멘volumen이라고 합니다. 책 한 권을 뜻하는 볼륨volume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지요.
파피루스와 함께 책 문화를 주도한 또 하나의 재료는 양피지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세계 최고의 도서관으로 만들기 위해 경쟁자인 페르가몬 왕국에 파피루스 공급을 중단했는데, 이 때문에 페르가몬에서 양피지를 개발해 발전시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후 양피지는 파피루스보다 튼튼하고 실용적인 재료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양피지 역시 처음에는 두루마리 형식으로 보관되었으나, 이후 코덱스 형식으로 발전해갔습니다. 양피지를 접어서 만든 코덱스 책은 두루마리보다 간편하게 쓰고 보관할 수 있어서 폭넓게 이용되었습니다. --- p.116

한편, 일찍부터 종이책이 등장한 중국과 한국 등에서는 실로 꿰매는 선장線裝 제본이 발달합니다. 선장은 표지의 오른쪽을 꿰매는 것인데, 일본과 중국은 네 바늘을 꿰매는 데 비해 한국은 다섯 바늘을 꿰매는 것이 다릅니다. 한국에서는 또 절첩본折帖本이라 하여, 넓고 큰 본문종이를 길이와 너비 모두 한 번 이상 접어서 판형을 극소화한 책이 지도첩 등에 많이 쓰였습니다. 이런 제본방식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입니다. 그 밖에도 병풍처럼 연결한 선풍장琁風裝이나 나뭇잎처럼 각 장이 떨어지는 엽장본葉裝本 등 다양한 제책방법으로 책의 아름다움을 살렸습니다. --- p.118

번쩍, 히데오는 눈을 떴다. 눈앞이 환했다. 뒷방에선 쇼하치가 마지막 불길을 잡고 있었다. 쓰유가 원망어린 눈길을 던졌지만 히데오는 아랑곳 않고 성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장인은 물을 뒤집어쓴 채 타다만 장작처럼 누워 있었다. 히데오는 다짜고짜 장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무슨 짓이에요?”
쓰유와 쇼하치가 놀라 외쳤지만 히데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쇼하치는 물론이고 쓰유도 처음 보는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그 서슬에 놀라지 않는 건 죽어가는 장인뿐인 듯했다. 눈썹까지 불에 탄 흉측한 얼굴에선 설핏 웃음기마저 엿보였다. 멱살을 쥔 히데오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신이야……, 그렇지?”
장인은 담담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군. 내 운도 다한 건가, 흐흐. 어차피 이렇게 됐으니 다 말하지. 그러니 손은 좀 놓아줘.”
히데오의 두 손이 맥없이 떨어졌다. 집 밖에서 웅웅 바람이 울었다. 불씨가 다 꺼진 컴컴한 방 안은 무덤 속처럼 춥고 괴괴했다.
“십육 년이다, 히데오.”
그을음이 들러붙은 것 같은 쉰 목소리가 차가운 적막을 깼다. 히데오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그 어깨를 잡아채듯 목소리가 이어졌다. --- pp.140~141

가시혼야의 활발한 활동상은, 당시 통속소설의 높은 인기를 반영합니다. 하지만 1841년 사치금지와 풍기문란 단속을 내세우며 덴포 개혁이 시행되자 출판계는 위기를 맞습니다. 서적조합과 지혼地本(에도 시대 출판된 책)조합이 모두 해산되고, 닌조본의 원조를 자처하던 다메나가 슌스이, 류테이 다네히코 등 유명작가들이 처벌을 받은 것입니다. 이 일로 소설 창작과 출판이 모두 크게 위축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틈을 타서 베스트셀러를 표절하거나 유사한 작품을 내놓는 등, 노골적인 상업주의를 앞세운 출판사들도 등장합니다. 더불어 표절과 짜깁기에 능한 삼류 작가들이 판을 치기도 하지요. (중략) 이런 소설들이 경쟁적으로 출판되면서, 이전까지 세책점에서 취급하던 목판본 책들은 점차 값싼 활판본에 자리를 내줍니다. 더불어 삽화의 질도 떨어져서 함부로 그린 조악한 그림이 판을 치게 됩니다. 자연히 독자들은 그림보다 글 위주의 책을 찾게 되었고, 이처럼 삽화를 곁들인 비싼 목판본 책이 활자 위주의 값싼 활판본으로 바뀌면서 책을 빌려주는 대여점보다 서점이 늘어납니다. 그 과정에서 에도 시대를 풍미했던 가시혼야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한 가지 꿆이한 점은, 조선과 일본에서 모두 세책업이 성행했던 데 반해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인쇄업과 출판업이 발달하여 세책업이 큰 인기를 끌지 않았다는 겁니다. 중국의 세책업은 오히려 출판업이 한창 발달한 19세기에 뒤늦게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주로 최하층민을 상대로 질 낮은 소설을 빌려주는 형태여서 규모나 비중은 매우 영세했고, 출판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 pp.154~155

장부의 맨 앞에 ‘살아 있는 도서관 이용수칙’이 적혀 있었다.

1. 책은 사람이다.
2. 대출은 한 시간 기준 금화 한 닢. 대출 연장은 1회에 한해 허용한다.
3. 빌린 책은 열람실에서만 열람 가능하며 타 지역으로 반출할 수 없다.
4. 책 열람에 필요한 통역기는 별도 대여한다. 대여비는 은화 한 닢.
5. 책 내용에 대해 불만을 말할 수 없다. 대출비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 반납하지 않는다.
6. 책을 훼손할 시 대출자는 민형사상의 모든 책임을 진다.

장부를 펼치자 목록이 나타났다. 첫 항목은 ‘간수’였다. 제목 아래 작은 글씨로 “17년 동안 감옥에서 죄수들을 감독함. 알코올 중독 치료 중. 예약대출 가능”이라고 적혀 있었다. 다음 장엔 “거짓말쟁이-12세 이하 어린이 대출 불가”라고 쓰여 있었다.
“이게 뭐죠?”
“보신 대로요. 사람 책을 빌려보는 거지.”
“사람이 책이란 건가요?”
“그렇대두.”
“그럼 어떻게 읽지요? 얘길 하나요?”
“쯧쯧, 궁금하면 빌려요. 뭐든 물으면 대답을 해주니까. 근데 오늘은 마지막 날이라 빌릴 수 있는 게 별로 없수. 은행 강도는 대출중이고 마술사도, 음, 오쟁이 진 남편도 대출중이구먼. 남은 건 파계승이랑 섹스 중독자, 희생양뿐이오.”
그때 한 청년이 들어와 금화 한 닢을 던지고 섹스 중독자를 빌렸다. 청년은 검은 장막 뒤로 사라졌다. 장막 뒤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어쩔 거요?”
사내는 금화 한 닢을 꺼냈다.
“희생양을 빌리지요.”
“저쪽 끝 방으로 들어가슈.” --- pp.162~163

무엇보다 흐트러짐 없는 서체로 굵지도 얇지도 않게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침녘에는 반석처럼 강건하던 팔이 오후가 되면서 물 먹은 솜처럼 한없이 무거워져, 팔을 오르내릴 때마다 펜 끝에 닿는 힘이 달라지기 일쑤였습니다. 그리하여 반듯해야 할 글씨가 멋대로 비틀거리지 않도록 팽팽한 긴장 속에 하루를 보내고 나면, 칼을 쥔 왼손도 펜을 쥔 오른손도 돌처럼 굳어서 빵 한 조각도 들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정신이 겪는 모멸이었나이다. 저희가 피땀으로 쓴 책으로 주의 말씀을 영접하면서도, “문자는 죽이지만 영은 살린다”며 필경의 노동을 폄훼하고, 내용도 모르고 글씨를 그리는 무지한 자들이라 조소하던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시뻘건 혀를 놀릴 때마다 제 펜은 분심憤心으로 흔들렸습니다. 하오나 슬프게도 그들의 비웃음을 순전한 거짓이라 비난할 수는 없었나이다. 말씀을 한 자 한 자 옮겨 적으면서도 머릿속은 온갖 망상으로 가득 차, 글귀를 읽고 내용을 새기는 법은 없는 것이 필경 수도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루에 고작 두세 쪽을 쓰면서도 감독 수도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오탈자를 내기 일쑤였습니다. --- pp.208~209

필사는 15세기 중엽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수세기 동안 책 문화를 주도했습니다. 하지만 필사 작업이라 해서 늘 똑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더 아름답고 읽기 편한 서체를 찾는 노력은 물론, 독서방법의 변화에 따른 필사방식의 변화도 나타났습니다.
텍스트를 소리 내어 읽던 고대에는 문장을 공백 없이 이어 쓰는 연속기법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다 중세에 들어 눈으로 읽는 묵독이 늘어나면서 ‘쓰인 말’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문장을 쓸 때 띄어쓰기, 구두점, 기타 부호를 이용하는 일이 나타납니다.
특히 ‘in numero’(수량에서)를 ‘innumero’(무수한)로 오독하는 것처럼, 필경사가 글을 잘못 읽거나 단락을 잘못 구분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도 낱말 사이를 띄고 단락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했지요. 이에 따라 11~12세기에는 띄어쓰기가 정착되었고, 아울러 단락의 시작 글자에 색을 주거나 장식문자를 활용하는 일도 늘어났습니다. --- pp.219~220

차리사(테오필로스 고발인)
“바로 그 점이에요. 그런 식의 오해, 기독교와 이슬람의 적대를 과장하는 케케묵은 시각들이 문제란 거죠. 칼리프 오마르가 이집트를 정벌했을 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이미 예전의 명성을 잃은 상태였어요. 이슬람군이 도서관에 도착했을 때 남은 게 얼마 없었다는 건 저명한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이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슬람 정복군이 책을 땔감으로 써서 목욕물을 데웠느니 어쨌느니 하는 전설이 아직도 사실처럼 떠돌고 있어요. 아마 서구 문명인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겠틁. 기독교 주교가 이단이란 이유로 고대 문명을 파괴하고 학자들을 살육했다는 이야기보다는 훨씬 듣기 편할 겁니다.
제가 테오필로스를 단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 서구인들이 가진 뿌리 깊은 배타성, 우월주의, 문명에 대한 독점욕은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닙니다. 자신의 신앙만이 옳으며 다른 생각이나 믿음은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된다는 강퍅한 정신이 인류문화를 얼마나 피폐하게 만들었는지 보세요. 테오필로스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만 파괴한 게 아닙니다. 그런 정신이 중세 1,000년을 지배하며 숱한 사람들을 화형대로 보냈다는 걸 기억하십시오. 한 권의 책만 있으면 된다는 믿음, 자신이 모든 진리를 안다는 오만, 그보다 무서운 건 없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책이 존재하는 이유는 수많은 사람, 수많은 생각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테오필로스는 그걸 부정했습니다. 그건 책을 부정한 겁니다!” --- pp.247~248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책을 탐내는 마음은 단순한 물욕物慾과는 다르다는 건데요, 그래선지 책 도둑 중에는 애서가가 많습니다. 장서가인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가 주교 시절 한 화가의 화실에서 책을 훔쳐 나오다가 몽둥이찜질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중략) 그런가 하면 제 욕심을 위해 책을 찢고 훔친 질 나쁜 책 도둑들도 많습니다. 18세기 초 영국에서 고서학회를 창립하기도 한 존 백포드는 평생 영국 전역의 도서관을 돌며 고서 3,355권의 일부를 뜯어냈습니다. 책을 쓸 때 참고자료로 쓸 요량이었다지만, 정작 쓴 것은 자신이 한 짓을 자랑삼아 기록한 게 전부였지요. 그런데도 조지프 에임스라는 자는 거기에 감화를 받아 무려 1만 428개의 책장을 찢어냈으니, 어이없는 책 도둑들 때문에 책들만 수난을 당한 셈입니다.
책을 훔치는 자들 중에는 학식이 높은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리브리 백작은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명망 있는 학자였습니다. 1841년 그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역사문헌들의 목록을 작성하도록 위촉되었는데, 이후 6년간 직위를 이용해서 고문서 등을 빼돌렸습니다. 훔친 책들은 영국에 팔았고, 프랑스 당국의 의심을 받자 영국으로 도망갔다가 고국에서 여생을 보냈지요.
또 스페인어 교수이자 사제였던 한 사람은 사모라 교구에서 귀중본 466권을 훔쳐 세계의 수집가들에게 팔았고, 영국 BBC방송국의 음악전문가는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서 베살리우스의 『인체구조에 관한 7권의 책』(일명 ‘파브리카’로 불립니다) 사본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스티븐 블럼버그라는 전문 책 도둑은, 미국과 캐나다를 돌며 2만 3,600권의 희귀본을 훔쳤습니다. --- pp.255~256

잊지 않은 것은 오직 하나, 책이었다. 눈 녹은 비탈에서 미끄러진 몸이 데굴데굴 굴러 어느 순간 정체불명의 구덩이로 떨어질 때에도, 신의 머릿속에 오롯한 것은 책이었다. 이윽고 캄캄한 눈앞이 서서히 밝아졌다. 물소의 거대한 뿔이 신을 겨누고 있었다. 신은 숨을 멈췄다. 한 생애를 돌아보기에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물소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신의 입에서 탄식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 그림이었다.
동굴은 왕궁의 회랑처럼 이어졌고 그림도 벽을 따라 계속되었다. 물소를 모는 사람들, 몸통을 뚫은 창과 화살, 분수처럼 솟구친 피, 사냥을 자축하며 춤추는 사람들, 이야기는 동굴의 마지막 방에서 끝났다. 쓰러진 물소 옆에 잠자듯 누워 있는 사람. 그의 몸은 앙상했으나 얼굴은 평화로웠다. 신은 오래전에 잠든 그에게 심한 질투를 느꼈다.
황제에게 동굴 책을 바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신은 동굴 벽에 종이를 대고 조심스럽게 솜방망이를 두드렸다. 수천 년간 지하 동굴에서 잠자던 짐승과 사람들이, 춤과 기도가 신의 손끝에서 깨어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땅 속 깊이 뿌리박힌 책은 수백 장의 종이에 옮겨져 햇빛 찬란한 황제의 주랑을 장식하였다.
“네 충심이 늙은 나를 울리는도다!”
황제는 돌아오라 하였으나 신은 다시 길을 떠났다. 황제의 땅은 넓고 왕궁은 새로 지어졌으니 도서관 또한 늘 빈자리를 지닐 터였다. 무엇보다 아직 보지 못한 책에 대한 열망이 채찍이 되어 신을 재촉하였다. --- pp.270~271

인류의 역사는 사람이 무엇보다 ‘읽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태초에 사람은 하늘의 별을 통해 미래를 읽었고, 천둥과 번개, 홍수와 가뭄에서 신의 뜻을 읽었으며, 서로의 얼굴에서 적과 친구를 읽고, 서로 다른 손금에서 서로 다른 운명을 읽었습니다. 하나하나의 자연현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런 의미들로 세계를 재창조하면서 사람은 자연스럽게 책에 다가갑니다. (중략) 문자의 발명은 본격적인 책의 시대를 열어젖힙니다. 기원전 3,000여 년 전, 수메르인들은 점토판에 갈대 펜으로 각종 정보와 지식을 기록합니다. (중략) 점토판과 거기서 발전한 밀랍쟆은 필기도구로서 꽤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밀랍판의 재료인 너도밤나무를 뜻하는 앵글로색슨어 ‘boc’에서 영어의 ‘book’이 유래한 것만 봐도 그 생명력을 알 수 있지요. (중략)
아주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주위의 모든 재료를 이용해 책을 만들었습니다. 돌, 흙, 가죽, 잎사귀, 바위, 넝마, 비단, 종이 등 온갖 것들에 자신의 생각을 담고자 했던 인간의 마음. 그것은 불멸을 향한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책은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불멸을 꿈꾸는 인간의 소망을 표현하며, 인류의 역사는 또한 책의 역사인 것입니다.
--- pp.274~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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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상상력의 소산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들과, 그 흥미를 눙치는 건조한 문체가 얄밉도록 잘 조화를 이룬다.
윤석남 (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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