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들어갈 즈음이 되어서야 나는 내 손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들의 손보다 훨씬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피부감각, 그러니까 촉각이 기가 막히게 섬세하다. 아니, 지폐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섬세하다는 말만 가지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초능력에 가까운 게 아닐까? 보통 사람은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는 미세한 자극까지도 정확하게 감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손끝이 마치 희미한 빛을 발하는 스캐너와도 같다.
게다가 이 민감하기 짝이 없는 촉각에 촉발되어 내 손가락 끝은 나도 감탄하리만치 기가 막히게 움직인다. 예를 들면 오른손에 실, 왼손에 바늘을 쥔다. 두 팔을 힘껏 벌린 상태에서 눈을 감고 두 팔을 오므리면 어김없이 바늘구멍에 실을 꿸 수 있다. 이런 재주도 부릴 수 있을 정도니, 아무리 치밀함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도 내 손에 걸리면 식은 죽 먹기였다. --- pp.15~16
“그 얼간이의 아버지, 시마다 고키치. 시마코상사 대표이사 사장…… 알고 보면 우익 계열의 야쿠자지. 이 바보 아빠가 황당한 생각을 한 거야.”
“뒷구멍으로 입학시키는 거?”
수학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내가 정곡을 찔렀나? 짐짓 대단한 비밀을 말해주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가 핵심을 찌르는 바람에 허탈해진 모양이었다. (…중략…)
“이 아저씨가 손에 넣으려는 시험문제를 가로채는 거야. 너랑 내가.” --- p.54
왠지 무척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밤 오락실에서 수학을 만난 뒤로 내 신변이 갑자기 분주해진 것 같다. 지금까지 10년을 하루같이 아무 일 없이 지겹고 따분한 나날을 보내왔는데 이번 한 달 동안은 마치 롤플레잉 게임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다. 브라운관 안에서만 존재하던 모험이 현실이 되어 나를 끌어들이려 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가진 아이템이라고는 이 손의 능력 하나뿐, 마법의 주문도 칼도 날개도 없다. 그런데 과연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 p.155
“난 원래 왼손잡이란다. 평소엔 쓰지 않지만, 좋은 기회니까 너도 잘 봐둬라. 간단해. 커터 날을 본드로 손톱에 붙이기만 하면 되는 게야. 손가락을 이렇게 해두면 호주머니 터는 데 아주 그만이지. 가방도 가죽이 아니라 천이면 얼마든지 자를 수 있단다. 물론 사람의 눈알이나 목 줄기의 경동맥 정도는 단칼에 그어버릴 수 있지.”
나는 소름이 오싹 끼쳐서 눈을 막 깜박였다. 이미 눈알을 베인 듯한 착각이 들어서였다. 속주머니를 털 때의 그 속도로 공격을 당하면 막아낼 재간이 없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얘, 가부라기야. 난 굳이 너희가 하는 일을 방해하려고 이러는 게 아니란다. 오히려 뭐라도 좀 도와주고 싶어서 나도 끼워달라는 게지.”
치사토 할머니는 날이 붙은 검지를 손바닥 안으로 숨기듯이 쥐더니 천천히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오른손으로 녹차가 든 찻잔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마셨다.
“우리 일에 껴서 뭐 하시게요? 할머니도 대학 들어가시려고요?” --- p.222
“가부라기는 외톨이야. 옆에 아무도 없어. 그래서 그렇게 약삭빠른 얼굴이 되어버린 거야. 너무 불쌍해.”
“나도 혼자인데.”
“가부라기는 말이야, 정말로 혼자야. 초등학교 때 부모님이 이혼했거든. 어머니랑 같이 살게 되었는데 금세 재혼했어. 그리고 중학교 때 어머니도 돌아가셨어. 생판 남들하고 같이 살게 돼버린 거야. 정말 불쌍한 애야.”
정말 불쌍한 애야, 정말 불쌍한 애야, 정말 불쌍한 애야. 그림 속의 허클베리 핀이 그렇게 호소했다. 나는 현기증이 나서 벌렁 자빠질 뻔했다. 그런데 뒤에 있던 기쿠치가 나를 잡아준 모양이다. 나는 아직 서 있었다.
“허클베리는 자기 집이 없었어. 그래서 톰 소여랑 같이 모험을 떠난 거야. 그런 거야, 그런 거야, 그런 거야. 내가 하는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 pp.244~245
“노부오야, 내가 한 가지 일러두고 싶은 말이 있는데…….”
치사토 할머니는 진지한 얼굴로 내 쪽을 바라보더니 조용한 말투로 말했다.
“하기야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긴 하지. 난 의리도 저버리고, 남편까지 버린 여자니까. 자식도 죽게 했고, 감옥살이를 한 적도 있고, 친구도 다 떠나가버린 불쌍한 인생이지. 하지만 그러니까 너한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게야. 너, 나 같은 인생을 걷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뒷길만 골라 다녀야 하는 짓은 그만둬야 한다. 소매치기 기술을 가르쳐놓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말이다. 대학에 들어가면 이 짓은 그만두도록 해라. 돈 같은 건 그냥 자기 먹을 만큼만 일해서 벌면 되는 게야. 욕심 부리자면 한도 끝도 없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그 손은 다른 누군가를 위해 꼭 필요할 때만 쓰도록 해. 이건 너한테 이 할미가 하는 진심 어린 충고란다.”
(…중략…) 치사토 할머니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젊었을 적엔 늙은이가 하는 충고 따윈 그저 거추장스러울 뿐이었으니까. 으이구, 내가 주책이지, 이게 뭐 하는 짓이람.” --- pp.302~303
굳이 아픈 몸을 이끌면서까지 위험한 짓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실패하면 이보다 더한 고통을 당할 수도 있는데. 그냥 얌전히 물러나는 편이 낫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타이르는 한편으로 내 가슴속에는 분함과 억울함이 솟아나고 있었다. 여기서 이 일을 포기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인생도 포기한다는 의미일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기쿠치의 방에 걸려 있던 톰 소여의 그림. 허클베리가 짠 뗏목을 타고 몇 번씩이나 위험한 일을 당하면서도 강을 타고 내려왔는데, 목적지를 바로 눈앞에 두고 그냥 잡초도 나지 않는 허허벌판 기슭으로 올라가버려야겠는가? 그러면 다시는 뗏목을 탈 수가 없게 된다. 기쿠치도 틀림없이 나한테 실망해서 수학과 함께 하류로 떠나가버릴 것이다. 더구나 저 징그럽고 치 떨리는 생선대가리 새끼는 하류에 있는 아름다운 섬에 여유롭게 상륙해서 4년 동안 능글능글 웃으며 즐겁게 지낼 것 아닌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이대로 두고 보라는 말인가? --- p.389
엘리베이터가 감속하기 시작했다. 로비가 가까워졌다. 나는 오른손에 기를 모았다. 너무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지 상처에서 오는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지금의 나라면 할 수 있어. 수학 손에 있던 볼펜을 빼서 기쿠치 손에 쥐여줬던 그때처럼 하기만 하면 돼. 시간의 틈새로 오른손을 미끄러지게 해. 초조해하지 마. 로비에 도착한 순간에 하는 거야.
손을 시마코 두목의 왼쪽 주머니에 조준했다. 그것은 견고한 요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바늘 끝 정도의 구멍만 있으면 된다. 내 오른손은 거기로 들어갈 수 있다.
찰깍 하고 머릿속에서 채널이 바뀌었다.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도착하면서 머리 위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문이 열렸다. 그 움직임이 내 눈에는 스틸 사진처럼 보였다. 나는 오른손을 날렸다. 검지 끝에 있는 칼날로 시마코 두목의 왼쪽 주머니 밑 부분을 그었다. 동시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디스켓과 파우더 팩트를 바꿔치기했다. 오른쪽 손목에 갑자기 통증이 느껴졌다.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것을 참고 오른손을 코트 주머니로 돌려놓았다.
문이 다 열렸다. 동시에 세상이 보통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pp.426~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