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는 히말라야나 티베트의 경이로운 자연보다 더 특별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그들과 함께 웃고, 울고, 싸우고, 사랑하다 왔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환한 햇살들이 부서진 나날들이었다고 감히 말하겠습니다. 히말라야를 넘어온 비구름 아래서도 반짝이던 햇살이었습니다. 웃고, 울고, 싸우는 것이 모두 사랑과 통하는 것이라면, 이 책이 ‘사랑 이야기’로 불려질 수도 있겠습니다. --- 「Prologue」 중에서
“그 여자들을 다 사랑했다는 거예요?”
이제야 우리가 어느 지점에서 엇갈리고 있는지 명확하게 감이 온다. 하지만 이미 ‘루비콘의 강’을 건넜다.
“글쎄요. 돌아보면 정말 사랑했던 여자도 있고, 아니었던 여자도 있는 것 같아요.”
사실, 내가 ‘사랑했다’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여자는 한 명뿐이었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려오는 20대 후반, 그 시절의 3년을 함께 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사랑을 어떻게 두 번 할 수 있어요?”
진부한 듯 하면서도 신선한 질문이다.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고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내가 그 사람이 싫어져 헤어졌대도 한때는 그 사람을 사랑한 거잖아요. 그 사람이 내가 싫어 떠났을 땐 평생 그 사람이 돌아오길 기다려야 하나요? 또, 새로운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고 해서 예전의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할 순 없잖아요?”
나직한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는 것도 가능하더라. 사랑? 내가 사랑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사랑이란 단호하게 일반화시킬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내 경험과 다른 사람들을 통한 간접 경험으로 얻은 ‘경우의 수’ 같은 건 있다. ‘이런’ 사랑도 있고 ‘저런’ 사랑도 있다. 사는 동안에 100명이 넘는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고, 100명이 넘는 남자를 사랑할 수도 있다. 디빠의 생각처럼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도 있다. 적어도 우리가 ‘사랑’이란 단어를 함께 사용해야 한다면, 그 경우의 수를 가급적 넓게 잡아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 「시즌 1, '사랑에 관한 두 가지 시선'」 중에서
“아뇨, 올 수 있어요. 전 괜찮아요.”
괜찮지 않았다. 로지는 매일 4시 50분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교실에 도착했다. 지각이 3일째 이어지던 날, 조심스레 이유를 물어봤다.
“4시 10분에 학교가 끝나는데요. 집에 들르지 않고 바로 뛰어와도 늦네요. 죄송해요.”
“학교가 어딘데?”
“할머니 집 근처에 있어요.”
택시로 25분이 걸리는 거리를 40분 만에 쉬지 않고 뛰어온 것이었다. 그것도 밑이 다 닳은 슬리퍼를 신고…….
차가 못 가는 지름길을 골라 왔겠지만, 이건 정말 너무한 일이었다. 너무 무심하고 안일한 선생과 너무 사려 깊은 아이…….
우리 반 출석부에는 세 가지 도형이 그려진다. ○,×,△. 로지의 출석 란에는 그 후로도 항상 ‘△’가 그려진다. 다수결로 결정한 수업 시간을 바꿀 수는 없으며, 지각은 지각이기 때문이다. 단, 나에게 로지의 ‘△’는 ‘○’보다 훨씬 어여쁜 도형이다. 미안하고 고마운 기호다. --- 「시즌2,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크 소리'」 중에서
가끔 네팔 최대의 힌두 사원 ‘뻐슈뻐띠_Pashupati’에 다녀온다. 힌두교인이 아닌 사람은 사원에 입장할 수 없지만,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카트만두 제1의 관광 명소다. 사원을 끼고 흐르는 ‘바그머띠’ 강은 갠지스와 만나는 힌두교의 성스러운 강이다. 규모 면에선 갠지스 강변의 화장터 ‘바라나시’에 견줄 바 아니지만, 이곳에서도 날마다 수십 명의 사자_死者들이 불에 타 사라진다. 사람의 형체가 완전히 사라진 낮은 불길 옆 칸에 새 장작더미가 쌓아올려 지고, 화염이 절정에 다다른 그 옆 칸에선 팔과 다리가 툭툭 굴러 떨어진다. 흰 천에 감싸인 주검들은 곳곳에 널브러져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산 사람들은 원활한 진행을 위해 그 사이를 분주히 지나다닌다. 강변으로 내려갈 수 없는 관광객들은 다리 위 같은 관람 포인트에서 이 풍경들을 내려다보며 촬영을 한다.
이곳에서 죽음은 250루피를 내고 구경하는 관광 상품이다. 조금 더 나아가도 ‘문화인류학적 관조’ 정도를 넘어서기 어렵다. 슬픔이나 아픔은 없다. 4개월간의 체류를 통해 이곳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해를 꽤 체득한 나로서도, 저 아래에서 타오르는 익명의 불길에 나를 이입하기는 힘들다. 뻐슈뻐띠에서, 산 자와 죽은 자는 서로 섞여들지 못하고 점점 더 격리된다. 죽은 자도 외롭고, 산 자도 외롭다.
--- 「시즌2,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