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그림을 그리기 직전에 피카소는 화가 앙리 마티스의 집에서 검은 나무로 만들어진 아프리카 조각품을 처음으로 손에 쥐었다. “그는 저녁 내내 그것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내가 그의 아틀리에에 갔을 때 바닥이 온통 종이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 종이들에 그려진 것은 모두 한결같이 흑인 여성의 머리라는 같은 모티프였다. 바로 그 여인이 나중에 그의 그림들 위에 나타났다, 이중으로 혹은 삼중으로. 그리고 갑자기 <아비뇽의 처녀들>이란 그림이 생겼다, 벽처럼 거대한 그림이 말이다.”라고 시인 막스 야콥은 말한다.
― p. 160 파블로 피카소 <아비뇽의 처녀들>
루이 14세는 이를 드러내면서 웃기를 좋아했지만 말년에는 단 한 개의 치아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릇된 위생관념의 희생물이 되었던 것이다. 물로 씻기보다 향수를 선호하던 그 시절에 사람들은 치아가 위험한 감염의 진원지라고 믿었다. 치아가 질병을 유발시킨다며 왕의 불행을 예방하기 위해 주치의들은 그에게 건강할 때 치아를 빼내야 한다고 제안했다. 불행하게도 루이 14세는 이를 승낙을했고, 그후 의료사고가 연이어 생겼다.
위풍당당하던 통치자의 용모는 불쌍한 인간의 모습으로 왜소해졌다. 마취 없이 진행된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첫 국부수술이 끝나자마자 농양이 생겼다.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 의사들은 나머지 모든 치아를 뽑아냈다. 그런데 고약하게도 이때 구개골의 일부가 함께 부숴졌다. 그 때문에 입천장에 생긴 구멍은 “살균의 목적에서 뜨겁게 달구어진 인두”로 소독되었다. 왕은 그런 고문 아닌 고문을 용감하게 넘겼으나 그의 얼굴은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 p. 108 이아생트 리고 <대관식의 제왕 성장을 한 프랑스의 루이 14세>
생명력이 고동친다. 북을 치고, 개가 짓고, 창과 무기가 들어올려지고, 깃발이 펄럭이고, 어린 아이들은 뛰며 돌아다닌다. <야경(夜警)>은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 하르멘스 반 레인의 걸작품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 작품엔 딱 하나의 난점이 있다. 그림 내용이 야간 순찰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야경>이란 제목은 18세기 말 여러 번 덧칠해진 그림의 니스 층이 누렇게 바래서 그림 속 광경이 마치 밤에 찍은 사진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붙여졌다. 그림의 원래 제목은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이다. 그리고 그림에서 보이는 것은 야간 순찰이 아니라 암스테르담 민병대의 단체 초상화이다.
― p. 100 렘브란트 하르멘스 반 레인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의 민병대>(<야경>)
해외 별견의 시대가 오자 상거래는 명실상부하게 국제적인 일이 되었다. 중국에서 발명된 지폐가 유럽에서는 단지 공탁된 경화에 대한 증명서쯤으로 여겨지던 그 시대에 주화의 재료 가치는 주화의 액면가와 일치햇다. 그러나 돈의 모양은 지역에 따라 모두 다랐다. 오직 환전상만이 저울과 현미경을 이용해서 무게와 귀금속의 함량에 따라 주화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었다. 때문에 대형 상거래 중심지나 대목장에서 환전상은 빼놓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길거리의 평범한 남자도 그를 필요로 했다. 주둔지 도시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싶어도 주머니에 고향의 주화밖에 없는 군인은 환전상의 도움 없이는 물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플랑드르의 화가 쿠엔틴 마시스는 안트웨르펜의 한 환전상을 관찰했다. 안트웨르펜은 당시 네덜란드의 중심 항구였고, 따라서 최상급 경제 중심지였다. 환전상은 그에 걸맞은 명망을 누렸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색하고 탐욕적이며 고리대금업자라는 의심을 끊임없이 받았다. 아마 그래서였을까? 환전상의 부인은 기도서 앞에서 생각에 잠긴 듯하다. 그녀는 내심 남편과 자신이 돈과 부에 의해 시험에 들지 않기를 바라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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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사람들은 매우 일찍 결혼을 했고, 교회의 간섭없이 혼인이 성립되었다. 두명의 증인 앞에서 신의의 약속과 함께 이루어지는 결혼식은 순전히 세속저인 행사였고, 간혹 결혼 당사자의 방이나 거실에서 거행되기도 했다.
이러한 결혼 의식이 후대인들이 볼 수 있도록 그림으로 표현된적은 드물었다. 몇 안되는 결혼식 그림 중 하나가 네덜란드 화가 얀 반 에이크가 그린 <아르놀피니의 결혼식>이다. 이탈리아의 루카 태생으로 벨이게의 브뤼헤에 정착한 상인 가계의 자손인 미켈레 아르놀피니가 신부 엘리자베스와 결혼한다. 이 두사람은 나중에 갈라서지 않았을까? 그 당시에도 원칙적으로 이혼은 가능해삳. "우리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안 이상 - 악마가 그렇게 되게끔 했고, 하느님도 우리가 함께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 헤어지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메로빙거 시대의 한 문구가 있는데, 이 표현은 오래도록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혼한 사람들은 독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아웃사이더였다. 플랑드르 지방에서는 서른이 되도록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남자에게 언제까지 결혼하도록 최후의 날짜를 통보햇다. 그런데도 결혼을 하지 않을 경우 그는이른바 '굴욕의 책'에 이름이 오라가는 치욕을 당해야 했다. 만약 그가 최후의 통보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맞아들이지 않는다면 - 나이든 처녀, 성직자, 수도사와 수녀 등이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처럼 - "결혼하지 않고 죽은 이들은 하늘에서 별처럼 빛난다"란 구절이 있는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위안 삼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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