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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과 토마토

유령과 토마토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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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3년 03월 27일
쪽수, 무게, 크기 400쪽 | 522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89433736
ISBN10 898943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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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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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 시간을 그래도 잘 버텨냈다. 이제 너도 세상으로 나가 제대로 된 일을 할 때가 되었어. 한 치의 사사로움도 없이 공정한 명백함만이 이 일의 생명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커다란 대학병원을 눈앞에 둔 그는 엄중하게 충고하고 격려하던 최고 상관의 나직하고 굵은 목소리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개인적 감정이 네게는 독이 될 게야. 모든 것을 법대로, 순리대로 진행해야 한다. 이 일만큼 중요하고 막중한 일은 없어.”
어린아이를 물가에 내놓듯 몇 번을 다짐하고 나서야 그에게 첫 임무가 부여됐다. 사사로운 감정을 다스리는 일. 쉽지 않지만 그의 직업상 꼭 해야 하는 일이었다. 냉철하고 예리하고 현명한 남자인 그는 당연히 해낼 수 있다.
첫 임무지에 도착한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이 만나봐야 할 사람을 찾았지만 워낙에 초짜인 그인지라 조금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이니까 헤매는 건 당연한 거야. 다음부터는 나아지겠지. 그는 그렇게 자신을 격려하며 주위를 살폈지만 아무래도 낯설은 곳이었다.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까를 잠깐 고민할 때 젊은 의사들의 나직한 대화가 그의 귀에 들렸다.
“장기 기증? 내가 왜 그런 걸 해야 하지?”
“넌 네가 의사이면서도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니?”
인구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차가운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이 녀석은 언제나 시니컬하다. 사실 그에게 어떤 기대를 하고 제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지나치게 차가운 친구의 얼굴을 보면 어쩐지 인구는 더더욱 설득해야 할 의무감 비슷한 것을 느낀다.
“전혀. 난 의사지 환자가 아니야. 의사가 괜히 쓸데없이 아무 데고 감정 낭비하는 건 소모적인 행위야.”
“아무 데나?”
도현의 무신경한 표현에 인구의 눈썹이 올라갔다.
“너도 알다시피 난 내 한 몸도 벅찬 사람이야. 그리고 솔직히 재수 없을까봐 그런 짓 못해. 누가 알아? 그런 쓸데없는 짓 해서 내일 죽을 거 오늘 죽어버리게 될지.”
“너, 말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아니, 전혀.내 피 한 방울도 아까워서 난 헌혈도 안 해. 그런데 재생도 안 되는 신체 일부를 내놓으라니.”
“죽고 나서야 아무 상관없잖아. 네 죽음으로 다른 생명을 살린다고 생각해봐.”
“나 죽고 나서 뭘? 장기 기증을 하려면 신체 건강한 젊은 나여야 하고 그러면 결국 요절이라는 걸 해야 하는데 죽은 것도 서러운데 거기다 내 한 몸 희생까지 하라고? 그런 어림없는 얘기 나한테 비추지도 마. 시간 낭비야.”
“맞았어. 네게 이러는 건 시간 낭비야. 하지만 난 이런 낭비를 계속할 거야.”
“마음대로.”
너무나 진지하게 말하는 인구의 진심에도 어깨를 으쓱이는 도현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 저렇게 돌같이 무감각하고 얼음같이 차가울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빤히 듣고 있던 그는 너무나 차가운 - 거의 자신만큼이나 냉정하고 쌀쌀맞은 - 어조에 혹시나 자신의 동료인 듯싶어 고개를 돌려서 대화의 주인공을 바라봐야 했다. 하얗고 잘생긴, 그러나 시꺼먼 마음을 가진 뜨겁게 살아 숨쉬는 인간의 눈동자가 그와 마주쳤다.
2999호 저승사자가 인정머리 없는 그 녀석을 처음 본 것은 혹독한 훈련 끝에 최초의 임무를 부여받고 호기도 당당하게 세상에 나간 첫날, 바로 그때였다. 하필이면 그 영광스럽고 기념될 만한 날에 운명처럼 스치게 된, 아주 마음에 안 드는 인간 녀석과의 조우는 그가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내내 계속 그의 신경을 긁어댔다. ‘사사로운 감정’이 생길 만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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