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예술, 철학에서 자주 만나는 말, 자유. 가슴 설레는 이 마법의 단어를 건조한 나의 일상어로 번역하면 노처녀 비정규직이 된다. ‘관리’를 필요로 하는 애인이나 가족, 보전해야 할 직장을 물론이고, 매일 오르락내리락 하는 증권 수치를 보면서 굴러야 할 재산도 없다는 뜻이다. --- p.6
여행이 언제나 호사스러움과 여유의 자식인 것은 아니다. 가끔, 아니, 생각보다 훨씬 자주, 여행은 외로움과 권태의 산물이며, 출구 없는 일상의 마지막 보루이기도 하다. --- p.6
방학기간을 꽉 채워 비행기 왕복표를 샀다. 돌아오는 표를 쓸 수 있을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애석해할 일은 아닐 것이다. 현실에서의 실종은 미지 세계에서의 나타남이고, 일상으로부터의 후퇴가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일 수도 있으니까 --- p.25
탕헤르, 싸구려 숙소에서 짐을 풀자마자 갑자기 나는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갔다. 이미 빛이 바래고 낯설어진 기억의 실타래가 나와 전혀 무관한 이곳에서 술술 풀려나왔다. 나는 낯선 곳에서, 가장 낯익은 아니 낯익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 p.26
일상에서 나는 초침으로 통합된 하나의 시간만을 알고 있다. 샤프샤오엥의 좁디좁은 이 골목에서 나는 불현듯 시계 바늘이 잘라지는 모습을,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 않는 시침과 그보다 좀 빠른 분침, 그리고 내게 익숙한 초침의 세 개로 분할되는 광경을 목격한다. 나는 삶에 많은 시간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오래도록 잊고 살았었다. --- p.41
모로코 전역에서 축구를 피해갈 수는 없다. 축구는 모스크처럼 모든 곳에 존재했다. 중요한 경기가 있는 날이면 남자들은 몇 시간 전부터 카페에 진을 치고, 해바라기처럼 온몸과 시선을 텔레비전 쪽으로 돌린 채 시합을 봤다. 별다른 게임이 없는 날이라면 벗과 함께 축구 이야기를 했고, 또 벗이 없다는 신문을 펼쳐 축구 관련 기사를 읽었다.
아이들과 남자 어른들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어른들에게 축구는 눈과 입, 책상을 내리치거나 허공을 오가는 손으로 하는 것인데 반하여, 아이들은 발로 축구를 했다. 또 어른들에게 축구를 하는 공간이 카페라면 아이들은 공이 굴러갈 수 있는 모든 장소를 축구장으로 변모시켰다. --- pp.49-51
천년 고도 페스의 구시가가 훤히 보이는 언덕이 있다. 이곳에는 15세기에 지어진 성벽이 있다. 13세기에서 15세기 페스를 수도로 삼았던 메레니드 왕조의 번영과 영광을 지키던 성벽이다. 왕조가 멸망하자 성벽도 더 이상 지킬 것이 없어졌다. 그렇게 성벽을 마모된 역사의 그림자를 드리운 채 저 아래 구릉지에서 펼쳐지는 삶을, 하얀 집들과 전파가 잘 잡히는 쪽으로 몸을 튼 위성 안테나를, 모스크를, 그리고 가느다란 모세혈관마냥 이 요새 도시 구석구석으로 생명의 피를 흘러 보내는 미로를 쓸쓸히 내려다본다. --- p.73
모로코에서는 국가의 기능으로 여겼던 사회보장제도가 자발적으로 운영되는 광경을 가끔 목격했다. 시장의 물건 값은 꽤나 탄력적이었다. 그것은 상인들이 여유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좀 더 받고, 그 이윤을 부족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상인들에게 이와 같은 사회적 책무가 부여된 것은 그들이 현금을 가장 쉽게 유통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허름한 구멍가게에도 ‘노블리스 오블리제’들은 많았다. 이처럼 사회의 기능을 개인이 알아서 수행한다면 무정부주의의 이상이 실현되지 않을까? --- p.79
한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모로코. 프랑스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과 달리 모로코 인들의 삶은 프랑스와 거리를 둔 것처럼 보였다. 프랑스 식당은 애써 가이드북을 들고 찾아다녀야 할 만큼 거리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브 몽땅의 나른한 샹송이나 현대 가요는 물론 프랑스 영화의 포스터 한 장 붙어 있지 않다. 아무도 알랭 들롱과 소피 마르소, 줄리엣 비노쉬가 누군지 몰랐다. 여러모로 프랑스를 추종하는 듯 보였던 모로코 사람들은 여전히 띠리리리 오리엔탈 음악을 들으며 손으로 쿠스쿠스를 먹고, 에스프레소가 아닌 박하차로 더위를 달랜다. --- p.95
언뜻 보기에는 신림동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과 페스 구시가 언덕은 흡사한 데가 있다. 다만 신림동은 적갈색 벽돌집들이 주종인데 반해 페스는 하얀 집들이 대세라는 점에서 인상이 그게 다르긴 하다. 차이점은 하나 더 있다. 페스의 옥상에서 해바라기처럼 한곳을 향하는 수많은 위성 안테나들. 해외여행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여의치 못하거나, 정치적으로 정신적으로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한, 아니면 그냥 다른 나라의 축구와 음악을 더 많이 들고 싶은 사람들에게 수신기는 훌륭한 해답이요, 자유로 향하는 통로일 것이다. --- pp.97-99
여러 항성과 행성들의 시간은 각기 다르게 흐른다. 먼 미래에 지구인들이 우주를 여행한다면 그 별들의 시간에 맞는 시계를 따로 만들든지 아니면 지구 시계를 그쪽 시스템에 맞게 로밍을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지구와 다른 별들 사이에서만 시간의 흐름이 제각각인 것은 아니다. 지구 내에서도 다양한 시간의 중력대가 존재한다. 흔히 제3세계라고 부르는 나라들에서는 아무리 정확한 스위스 시계라도 무용지물이 되기 십상이다.
모로코는 한국보다 9시간이 느리고 알래스카보다는 9시간이 빠르다. 영국과 같은 시간대에 놓여 있으니 전 세계 시간의 중심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깥에서 봤을 때 하는 얘기고 실제 그 나라 안으로 들어가면 표준 시간이 작동을 안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척 느리다. 걷는 것도, 먹는 것도 느리다. 심지어 뛰는 사람들조차도 슬로우 모션으로 돌아가는 필름의 주인공들처럼 보인다. --- pp.103-105
다산은 현실일 뿐 아니라 아이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달콤한 꿈이었다. 헤나 수크 모하메드의 동생 드리스는 결혼을 해서 아내를 둘쯤 두고, 건강한 아내한테서는 아이 일곱, 몸이 약ㅎ산 아내한테서는 아이를 셋 정도 낳은 게 소원이었다.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갖고 태어나니까. 그리고 아이들이 많으면 재미있지 않을까요?” --- p.137
잘 모르는 사람들과 내게 새로운 것들에 대해서 말하고, 그 낯섦 속에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는 내게 여행의 가장 큰 재미이자 소득이다. --- p.143
혼자 있을 때의 자유가 내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만은 아니다. 자유는 간혹 고독이라는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다. 그림자는 무게가 없는 것 같지만 낑낑대며 끌고 갈 수밖에 없는 짐처럼 버겁다. --- p.145
나는 마땅히 시장 홀릭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시장에 홀려 있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전적으로 물건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물건이 유기체인 시장의 외면을 구성한다면 내부에는 보이지 않는 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상인이었다. 상인은 돈이라는 피를 순환시켜 신체를 존속시키는 심장이었고, 상술은 시장 유기체의 생명 활동을 관장하는 메커니즘이었다. 시장의 재미는 물건보다 상인, 그리고 도술에 가까운 그의 상술에서 나왔다. --- p.149
가급적이면 가벼워야 할 편해질 수 있는 여행에서 편견은 버려야 할 짐 영순위다. 상인들과 나누었던 시시껄렁하거나 심각한, 혹은 인간적인 이야기는 때로 물건보다 귀하며, 생명이 없던 사물에 영혼과 아우라를 부여한다. 가끔씩, 특히 여행에서, 계획을 벗어난 충동과 지름은 어린이들의 눈과 입고, 그리고 마음을 즐겁게 하는 불량식품처럼 건강에 나쁠진 모르지만 달콤한 기억을 남긴다. --- p.161
눈에 보이는 것들을 따라가면 길을 잃고, 좌초할 것이다. 매번 변화하는 외양 뒤에 존재하는 항구적인 사막의 지도는 길잡이의 본능과 마음속에 펼쳐져 있다.
세관 통과 시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고, 무게 제한에도 전혀 걸리지 않았으며 돈을 주고 사지 않았지만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것이 있다. 모로코 사람들이 베풀어준 친절과 따뜻한 마음은 세월의 풍화작용을 견뎌내면서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 p.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