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은 성냥갑만 한 단칸방에서 다섯 식구가 함께 살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주 싸웠다. 가난 때문이었다. 늦은 밤, 형과 누나와 나는 천둥 같은 아버지의 고함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기 일쑤였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밥상을 집어던졌다. 누나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형도 울었다. 나도, 그리고 어머니도 울었다. 아버지가 무서웠다.
“아버지 잘못했어요. 아버지 잘못했어요.”
형과 나는 아버지 앞에서 빌기 시작했다. 잘못도 없이 잘못을 빌었다. 아버지의 분노는 자정을 넘어 겨우 그쳤고, 우리는 불안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창문 밖 달빛은 그래도 평화로웠다. 눈물 젖은 달은 둘도 되고 셋도 되었다.
이튿날 아침, 어머니는 떡국을 상에 올리셨다. 설날이었다. 김치보시기 하나가 반찬의 전부였다. 계란 고명이 몇 가락 얹혀진 떡국이었다. 찌그러진 양은 상에 둘러앉아 우리들은 말없이 떡국을 먹었다.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그때 침묵 사이로 “쿡” 하는 소리가 들렸다. 떡국을 먹던 아버지가 울음을 터트리셨다. 아버지는 안으로 안으로 울음을 삼키셨다. 울음소리는 삼켜지지 않았다.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눈물을 글썽였는지도 모른다. 사는 게 힘드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다. 시간이 지나도 아버지의 눈물은 잊혀지지 않았다. --- pp.9-10
고등학교 마지막 방학이 되자 나는 중앙시장에 가서 헌 리어카를 사 왔다. 귀때기 빨간 사과를 리어카에 가득 싣고 온종일 거리를 돌아다녔다. 이화동, 동숭동, 명륜동, 삼선교, 보문동을 아침부터 밤까지 온종일 돌아다니며 “사과 사세요”를 외쳤다. 그때 난 경험이 이성보다 강하고 언어보다 진실하다는 것을 알았다. 리어카를 끌고 예전에 살던 동네로 갔다. 낮은 언덕을 내려오는데 저 멀리 라라가 보였다. 예쁘고 단정한 모습 그대로였다. 나를 감추고 싶어 모자를 눌러썼다. 그러는 바람에 언덕에서 중심을 잃어 리어카가 길가에 서 있는 자전거를 들이받았다. 수북이 담겨 있던 사과들이 땅바닥에 뺨을 비비며 언덕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아이고 아이고 큰일 났네. 큰일 났어.”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소리쳤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사과 줍는 일을 도와주었다. 아주머니는 외투 앞자락에 한 아름 사과를 주워다 주셨다. 마지막까지 남은 바로 라라였다. 그녀와 나는 어색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한참을 걸은 후에야 리어카 위에 검정색 목도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라라가 주워놓고 간 것이었다.
장사를 하며 나는 많은 책을 읽었다. 길가에서도 담벼락 밑에서도 문학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아무도 없는 골목으로 들어가 사과를 먹었다. 바지에 닦아 한 입 가득 사과를 베어 물면 눈물 저편으로 엄마 얼굴이 고였다. --- pp.45-46
아저씨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아저씨가 내쉬는 한숨의 의미를 나는 알고 있었다.
“너는 식구가 늘었는데, 나는 식구가 줄었구나. 우리 집사람은 벌써 죽었다. 교통사고로 먼저 갔지. 뺑소니차에 치여 아무런 보상도 못 받았다.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뭐. 산 사람은 어찌 되든 살아가니까.”
빙긋이 웃고 있었지만 아저씨 얼굴은 쓸쓸해 보였다.
“유진아, 우리 소주도 한잔할까?”
“네. 그럼요. 아저씨 술 좋아하시잖아요.”
나는 자장면과 탕수육과 소주를 시켰다.
아저씨는 예전보다 술을 급하게 마셨다. 말수도 줄었다.
“아저씨, 생활하시기는 괜찮으세요?”
“밥은 먹고사느냐, 그 말이지? 잘 살고 있지. 이게 뭔 줄 아냐?”
“껌이잖아요.”
“껌이 아니라 무지개다. 나는 무지개를 팔고 있다. 이거 봐라.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흰색, 주황색, 파란색……. 영락없이 무지개잖니. 내가 파는 무지개는 향기도 기막히다. 색깔은 볼 수 없지만 향기라도 맡을 수 있으니 다행이지…….” --- pp.121-122
“이 소설 속엔 나의 이야기가 적지 않게 들어가 있지만, 소설적 상상으로 만들어진 허구도 있다. 나는 나의 글쓰기가 세상과의 소통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나의 글쓰기가 허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나의 글쓰기가 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소설은 한 개인의 소통과 허영과 밥을 뛰어넘어 그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 길은 내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캄캄한 빛이었다. 나는 지금, 충만한 기쁨으로 그 빛을 찾아가고 있다. 다만, 깊이가 없는 높이는 높이가 아님을 끝끝내 잊지 않을 것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