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턴이 사과나무 아래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다는 것은 과학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일화 중의 하나이다. 오늘날 그 사과나무의 일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학사 연구자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아무튼 그가 질량을 가진 두 물체간에 끌어당기는 힘을 수학적인 법칙으로 이끌어 낸 것은 천체의 운동에 관한 17세기 자연 철학자들의 혼란을 정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뉴턴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는 그 질문을 우리가 고대 그리스 최대의 자연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던진다면, 과연 어떤 답이 돌아올까? 그는 아마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사과를 이루는 흙과 물의 성분이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물체의 낙하 운동은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지구상의 어디에서든지 재현 가능한 현상이다. 그러나 정작 과학의 역사에서 그것은 해석의 대전환을 경험한 최고의 사례로 손꼽힌다. 오늘날 중력의 법칙에 의해 이해될 수 있는 낙하 현상은 불과 4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 다른 과학의 패러다임 속에서 해석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 플라톤과 마찬가지고 4원소인 물ㆍ흙ㆍ불ㆍ공기가 섞인 비율에 따라 서로 다른 물질이 생긴다고 보았다. 엠페도클레스에 의해 최초로 제기된 이 4가지 원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상의 모든 정지한 물질들은 그들 본연의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고, 본연의 장소를 이탈했을 때는 즉시 그곳으로 돌아가려 한다고 생각했다. 즉, 물 위로 떨어진 돌멩이는 물 밑으로 가라앉고, 공기방울은 물 위로 떠오르며 불은 공기 위로 타오른다. 이때 돌멩이가 물 밑으로 가라앉는 것은 그 본연의 장소가 다름 아닌 지구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흙과 물은 항상 지구 중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를 느끼고 있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불과 공기가 위로 향하는 것은 그들의 고향이 달의 천구(天球)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도 그 사과를 구성하는 주 성분인 흙과 물이 밑으로 떨어지는 본성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것은 납득할 만하다. 이처럼 물체가 그 주어진 본성을 따라 움직이는 현상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 초기의 기전기는 과학자들의 실험 도구라기보다 오히려 대중의 문화적 관심을 파고들었다. 비텐베르크의 자연 철학 교수였던 보세(Georg Mathias Bose, 1710~1761)는 혹스비의 기전기를 개량하여 일명 '전기 키스'라는 재미있는 실험을 선보였다. 무대 위에서는 한 남자가 기전기를 회전시켜 정전기를 만들어 내고, 그 옆에는 한 매력적인 여자가 청중 사이에서 선택한 한 신사에게 환영의 키스를 보낸다. 하지만 그녀의 키스는 매우 자극적인 것이었다. 기전기에서 흘러나온 전류가 그녀의 몸을 통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녀와 키스를 나눈 신사의 입술에는 강한 감전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이 실험이 지극히 단순하고 우스꽝스러운 연극의 일종으로 비춰질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전기에 대한 대중의 높은 관심에 부합했다. 당시 대중의 흥미로운 인기 상품이었던 기전기는 유럽 각지는 물론 에도 시대의 일본에도 도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네덜란드어 Elektriciteit(전기, 전류)에서 파생된 일본어 '에레키테르'는 정전기의 발생 장치로서 마찰을 이용한 기전기의 일종이었다. 1751년에 한 네덜란드인이 도쿠가와 막부에 '에레키테르'를 헌상했고, 에도 시대의 박물학자 히라가 겐나이(平賀源?, 1728~1780)는 네덜란드와의 무역이 활발하던 나가사키에서 고장난 '에레키테르'를 입수하여, 1776년에 그것을 모방 제작했다. 그가 만든 '에레키테르'는 나무통의 손잡이를 돌리면 내부에서 유리가 마찰되어 전기가 발생하고, 그것이 동선을 통해 방전되는 구조였다. 방전되는 동선을 손으로 잡고, 그 자극에 놀라거나 즐거워하는 모습은 천리경과 마찬가지로 '에레키테르'가 서양의 새로운 놀이도구로 일본에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보여 준다.
#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참호전을 타개할 목적으로 독일군이 계획한 것이 독가스의 개발이었다.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Fritz Haber, 1868~1934)가 독가스의 개발을 주도했다. 하버는 원래 유대인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자발적으로 독일군에 가담하여 나치에 충성한 인물로 알려진다. 독일군의 의도대로 그가 맨 먼저 개발한 독가스는 염소가스였다. 염소가스는 보통 수질 정화나 청소에 사용되는 것으로, 사람이 마시게 되면 기관지와 폐에 심각한 장애를 일으키고 곧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가스였다. 하지만 염소가스는 비교적 보관이 용이하고 운반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공기보다 무거워 참호 안으로 스며드는 특성이 있었다. 용기에 담긴 채 전선에 배치된 액화 염소가스는 적진으로 바람이 불 때, 적의 참호 쪽으로 살포되었다. 독가스의 살포가 독일군 측에 큰 승리를 안겨 주자 하버는 단숨에 독일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성공에 고무된 하버는 더욱 효과적인 독가스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연합군 측은 독가스 살포를 비인도적인 행위로 맹비난했다. 하버 또한 독가스가 얼마나 비인도적인 무기인지를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임무는 그 가스를 제조하는 것일 뿐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독일 정부의 선택이라고 강변했다고 한다. 남편의 독가스 개발을 강력히 만류했던 클라라 하버는 자살하고 말았지만, 하버는 여전히 독가스의 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독일군의 독가스 살포를 비난했던 연합군 측은 자신들도 독가스를 사용할 구실을 얻었다고 판단하고, 즉시 그 제조에 착수했다. 염소가스에 대항하여 영국군이 사용한 가스는 포스겐 가스였다. 강한 자극성을 지닌 포스겐 가스는 호흡을 통해 폐로 들어가면 폐수종을 일으켜 질식사하게 되는 가스였다. 그 밖에도 염화 피크린이나 겨자가스도 전선에 투입되었다. 독가스가 전쟁에 이용됨으로써 양측은 호흡기로부터 독가스를 보호하기 위해 방독면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제 1차 세계 대전은 결국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 이후 연합군 측에 의해 전범으로 지목된 하버는 스위스로 피신했다. 그러나 1918년의 노벨 화학상은 하버에게 돌아갔다. 수상 이유는 암모니아 합성에 대한 공헌 때문이었다. 19세기 말부터 증가하기 시작한 유럽의 인구는 당시 급격한 식량 문제를 초래했다. 식물이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원소는 질소인데, 이것이 식물을 자라게 하면서 점차 고갈되었다. 따라서 새로 식물을 재배하기 위해서는 땅에 질소를 포함한 초석 같은 비료를 반드시 공급해 주어야 했다. 하버는 철을 촉매로 하여 공기 중의 질소와 수소로부터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발견함으로써, 질소 비료의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다. 그가 독일군의 독가스 개발을 주도한 책임자였던 점을 생각하면 그의 노벨상 수상은 많은 논란을 남길만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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