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엄마.”
- 너 어디야. 밖이야?
영상 통화 버튼을 누르자 목소리는 엄마인데 화면은 예쁜 아인이로 가득 찼다. 심심하니 전화를 걸어달라고 고집을 부린 모양이었다. 내가 전화할 만한 멀쩡한 가족도 있다는 게 확인되자 경비 아저씨는 괜히 철제 정문을 매만지고 있었다.
“아인아, 외할머니랑 뭐 해?”
- 엄마, 엄마야?
“응. 우리 아인이 밥 먹었어? 할머니들이랑 노니까 재미가 없어?”
- 엄마아.
아인이는 내가 보고 싶다고 웅얼거리다 훌쩍였다. 독일에선 독일 말 못하는 외할머니만 아쉬웠는데 아인이도 한국 오고 처지가 바뀐 게 서러워 보였다.
“아인아, 아인이 데리러 갈까?”
- 됐어. 뭘 또 와. 너도 너무 다니지 말고 밥 먹어.
엄마가 흐느끼는 아인이를 달래는 모습이 보였다. 이내 전화기를 내팽개쳤는지 화면엔 어느 식당 천장만 가득했지만 차마 그대로 끊을 수는 없었다.
“아인아? 왜 울어?”
- 엄마아. 히이잉.
입을 내민 아인이가 전화기를 꼭 부여잡았다. 사랑하는 조카의 울먹임에 화면 속 작은 네모 안 내 얼굴도 같이 울상이 되었다. 거울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기분이다. 이만 전화를 끊으려는데 어느 무도한 남자가 그 작은 네모를 비집고 들어왔다.
“……네 딸이야?”
“엄마야! 하아.”
사람이 이렇게 놀랄 수도 있다니.
안 그래도 오랜 피로 누적으로 지쳐버린 내가 가슴에 손을 얹고 놀란 숨을 헐떡였다. 눈앞의 무례하고 뜬금없는 남자를 노려볼 힘도 없어 눈부터 질끈 감았다.
“잘못 봤나 했어.”
“…….”
할 말을 잊었다. 나는 이 뻔뻔한 남자를 두고 이번에도 어벙하게 굴었다. 반가운 척해본다거나, 도대체 네가 누구냐며 모른 척할 모든 기회를 놓쳤다.
“아, 서 선생님 친구분이셨어? 그럼 말을 하시지.”
“네. 괜찮으니 이만 가보세요. 제 친구거든요.”
경비 아저씨가 이 남자의 말 한마디에 반색하며 태도가 달라졌다. 왜 진작 말을 안 했냐는 타박 아닌 타박을 길게 하다 바로 자리를 떴다. 아까까지는 제발 좀 가줬으면 싶던 사람이 막상 떠나자 바짓가랑이라도 붙들어놓고 싶었다. 나와 이 남자 단둘이 있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한국 온 거야?”
“어.”
“아주?”
“아니.”
“그랬구나.”
뭔가 바로 이어 말을 할 듯했던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있다가 목덜미를 쓸며 웃었다.
“나 서이준인데.”
단답형의 성의 없는 대답을 깨트리고는 그의 이름이 나왔다. 내가 그를 모른 척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난 이제 자연스레 ‘맞다, 너 서이준이었지.’ 하며 마치 긴가민가했다는 말투로 웃어주면 그만이었다.
간단하다. 쉽다. 내가 다루는 꼬부랑 숫자들에 비하면 자존심이 상할 만큼.
“나 윤시은. 시아 아니고.”
나는 왜 이럴까. 답을 알면서도 기어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멍청하고 미련한 것과는 달랐다. 나는 이 남자를 모른 척할 만큼 뻔뻔하지 못했고 그럴 연기력도 부족했다.
“……그 소리 정말 오랜만에 듣네.”
서른이 갓 넘은 남자의 미소는 더 이상 상큼하진 않지만 그윽해졌다. 열여덟, 프랑크푸르트의 첫 겨울쯤에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다.
널 어떻게 모를까. 어떻게 하면 널 모를 수 있을까.
시아의 표현대로라면 이놈은 ‘착하고 순진한 우리 두 자매를 농락하고 뻔뻔하기 이를 데 없으며 얼굴값만 오지게 하는 천하의 나쁜 놈’이다. 그리고 내 표현대로라면 더없이 간단한.
“…….”
그러니까 ‘첫사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저 녀석의 기억 속에서 나는 어떤 애였을까.
13년 만에 우연히 아는 애를 만나 나를 설명한다면 너는 어떤 말을 할까.
“…….”
고민할 것도 없었다. 간단히 시아 언니라든가, 시아랑 쌍둥이라서 꼭 닮은. 시아, 또 시아.
“……어, 하여튼 그래. 윤시은 너 뭐해?”
“아. 응.”
“너 딴생각 했지?”
“아닌데.”
“너 거짓말 진짜 못한다.”
저놈이 나한테 친한 척을 한다. 웃긴 놈. 난 아무 말 하지 않고 밖을 내다보았다. 갑자기 교복 입은 학생들이 우르르 많아지는 걸 보니 하교 시각이 지난 모양이었다. 저중에서 혼자 다른 교복 입고 다니는 애가 나였는데. 갑자기 마음 한 군데가 찌릿해졌다.
“……혹시 딸 생각 중?”
“응?”
“아까 너랑 통화하던 애기.”
어어, 타이밍을 잘못 맞춘 침묵이 또 길어졌다. 충격까진 아니지만 뭐라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실제로 독일에서도 내가 아인이를 안고 다니면 딸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열에 아홉이었다. 그런데 같은 말을 이준에게서 듣자 입이 말라버렸다.
“너랑 되게 닮았더라. 하하, 당연한 건가?”
“어.”
일란성 쌍둥이 중에서도 유별나게 닮은 동생의 딸이다. 나를 안 닮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나는 속으로 삐죽했다.
“잠깐 보니까 울어도 예쁘던데.”
“그러니까…….”
그 와중에 마음은 갈팡질팡했다. 내 딸이 아니라 시아의 딸이라고, 그 말을 해줘야 하는데 마음이 괜히 울렁거리고 있었다. 저놈이 시아는 어찌 지내냐고 하면 난 또 뭐라고 하지?
“윤시은 너 잘 살고 있었구나.”
“……그게.”
이준은 눈치 없고 나쁜 놈이지만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법이다. 내게도 그런 것처럼.
“어, 잠깐만. 우리 아인이 예쁘지? 볼래?”
내가 휴대전화 배경 화면에 있는 아인이 사진을 내밀었다. 찝찝하긴 했지만 사나이의 첫사랑을 지켜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쓸데없이 의리가 있었다. 딱 윤시아 언니답다.
“진짜 예쁘다. 이렇게 보니까 너 더 닮았네.”
“응.”
“남편은 별로 안 닮았나 봐. 서운해하겠다.”
“……음, 남편은 없는데.”
“어?”
“결혼은 안 했거든.”
입매를 늘이고 있던 이준이 깜짝 놀라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아무리 의도치 않은 거라곤 하지만 너무 큰 거짓말은 버텨낼 자신이 없다. 꼬치꼬치 캐물으면 그건 어쩔 수 없다 생각했는데 이놈은 멋대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술을 꾹 붙였다.
“아아, 그렇구나.”
“응.”
“하기야 요새 그런 집 이래저래 많더라.”
그래, 독일이니까 뭐, 그럴 수도 있지. 이준이 나를 따라 창 밖으로 눈을 돌리며 몇 번 더 추임새를 넣었다. 쿨한 척하기는, 그러면서 나도 턱을 괴고 웃음을 참았다. 한 번씩 거짓말을 재미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그 기분이 이럴까 했다.
“아, 이제 가봐야겠다. 집에 엄마 오실 때도 돼서. 오늘 온 거거든.”
“벌써?”
너무 감상에 빠져 있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이준도 쓰윽 커다란 몸을 들었다.
“아니, 앉지. 난 그냥 가면 돼.”
“어디서 지내는데?”
“근처.”
“그럼 같이 가자. 데려다줄게.”
“아니, 진짜 괜찮아.”
손을 내저으며 가방을 챙겨 들었다.
“데려다줄게, 시은아.”
“괜찮다니까.”
아까는 몰랐는데 등 뒤로 올려다본 이준은 키가 한 뼘은 더 큰 것 같았다.
“그냥 같이 가. 처음도 아닌데 왜 그래.”
“……어.”
맞다. 이놈은 최소한 137번은 나를 데려다준 전력이 있다. 내가 회계사라서나 똑똑해서 외우는 건 아니지만 정확했다.
딱 137번까지 세다가 이 병신 같은 짓 좀 그만두자 하고 거기서 멈췄으니까.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