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요정, 지니
고장 난 노트북을 수리하는 순간, 그 속에서 나타난 노트북 요정 지니. 현실감 넘치는 3D 게임인가 했더니, 파비앵 눈에만 보이는 진짜 요정이란다. 덩치는 산만 하고, 한 달은 방치한 듯 덥수룩한 수염과 떡이 지도록 뭉친 머리카락……. 그런데 글쎄 당장 오늘부터 파비앵과 함께 살겠단다. 단박에 짜증부터 났지만 지니가 노트북의 마법을 보여 주자 파비앵은 경이와 공포로 몸을 떤다.
“아저씨가 진짜로 지니라면 제 소원을 모두 들어주나요?”
지니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음……, 솔직히 말하면 그건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야. 너는 나한테 인간 세계로 가는 차표를 마련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거든. 어쨌든 나를 구해 줬으니 네가 내 주인인 건 맞아. 너한테 빚을 진 셈이지. 뭐, 그런 상황이니 서로 말은 놓고 지내자고.”
파비앵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옛이야기는 하나같이 거짓말일 거라는 오랜 예감이 지니의 비정한 말을 통해 다시금 확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뚱보 식충이 같은 아저씨와 함께 지내야 한단 말인가? 밥을 먹건, 컴퓨터를 하건, 데이트를 나가건, 쉴 새 없이 참견을 늘어놓을 저 뚱보와 함께?
“뚱보 식충이라고? 거참, 고마운 말인데?”
파비앵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생각을 읽어요?”
지니가 뾰로통한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몹시 화가 난 모양이었다.
“모든 생각을 다 알 순 없지만 핵심 내용만큼은 콕 집어낼 수 있지. 내가 텔레파시 수업에는 별로 집중을 하지 않아서 말이야. 잘 알아 두라고!”
지니는 구시렁대며 노트북 자판을 툭 치고는 명령조로 말했다.
(중략)
“……복사해서 붙여 넣기.”
지니가 마우스로 모니터 속에 비친 여행 가방을 클릭했다. 그러자 갈색 여행 가방이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키보드 자판을 툭 치자 다시 처음의 색깔로 돌아왔다.
그런데 놀라운 건 모니터 속과 마찬가지로, 바깥에도 가방이 두 개로 늘었다는 사실이다. 파비앵은 머뭇거리며 복사된 가방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실제의 재료로 똑같이 만든, 손으로 만지고, 쥐고, 지퍼를 여닫을 수 있는 가방이었다.
“이 노트북은 현실 세계를 조작할 수 있어. 다른 기능도 보여 줄까?” --- pp.32~33
*게임 속으로
파비앵이 한눈에 반한 다프네는 워 크래프트와 시를 좋아하는 매력적인 소녀다. 파비앵은 다프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노트북의 비밀을 얘기하지 않는다는 이포와의 약속을 어기고 노트북의 비밀을 다프네에게 털어놓는다. 아니나 다를까 다프네도 노트북의 마력에 빠져 버렸다. 파비앵은 다프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이번에는 인터넷에 접속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그것은 지니 이포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었다.
“이건 어때? 귀여운 고전 게임 말이야. 왜 있잖아? 장애물이라고는 조잡한 숲이랑 단순 무식한 괴물들밖에 없는……. 어렸을 땐 참 좋아했지. 그 괴물들은 지직거리는 음악을 따라 좀비처럼 느릿느릿 움직일걸? 달아날 시간은 충분해.”
십 분 넘게 실랑이를 벌인 끝에 파비앵은 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이포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아예 말을 잃고 말았다.
마침내 둘은 게임 속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래픽은 실로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벽돌로 쌓아 올린 중세풍의 성에서 바라보니 아담한 숲과 희뿌연 강물과 삐뚤빼뚤한 도로가 죄다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한쪽에서 군사들이 티격태격 싸우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농노들이 황토밭을 무료하게 갈아엎고 있었다.
“세상에! 짱이다!”
(중략) 그때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해. 저 고인돌 뒤에서 뭔가 위험한 게 툭 튀어나왔던 것 같은데…….”
다프네는 이끼로 뒤덮인 고인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뭔가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흉측한지 말로 다 표현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얼굴은 치즈 파이, 몸통은 티라노사우루스, 다리는 거미를 닮아 있었다.
“우아, 저렇게 못생긴 녀석이었단 말이야?”
다프네는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만 있었다. 그 순간에도 괴물은 온 세상을 무너뜨릴 듯한 기세로 발을 쾅쾅 굴러 댔다.
“중요한 건 지금 우리도 이 괴물이랑 같은 차원에 있다는 사실이야!” --- pp.92~94
*불길한 예감
이포의 경고를 무시한 채 인터넷에 접속한 후, 현실 세계가 이상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걸음걸이가 버퍼링 중인 것처럼 어색해 욕실에서 식탁까지 가는 데 한참이나 걸리고, 오감이 무뎌져 물을 마셔도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다. 외할머니는 케이크를 식칼로 잘라 씹지도 않고 조각째 삼키고, 입술에 립스틱을 잔뜩 덧바르는 등 악몽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이포는 전날, 보안이 안 된 사이트에 접속해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다고 진단을 내리지만 빠른 해결책은 없다고 말한다.
“바이러스가 컴퓨터만 공격한 게 아니야. 현실 세계까지 감염시킨 것 같아.”
파비앵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컴퓨터 바이러스가 현실로 침투한다고?
“좀 자세히 설명해 봐!”
이포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못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바이러스가 있어. 그중에는 애교로 봐줄 만큼 사소한 것도 있지만, 하드 디스크를 파괴할 정도로 치명적인 것도 있어. 이번 바이러스의 정체는 아직 모르지만……, 언뜻 봐도 골치 아픈 놈한테 걸린 거지. 공간, 시간, 인간, 기계가 결합해 이상한 현상들이 발생할지도 몰라.”
순간, 이포가 외할머니를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곧이어 파비앵도 외마디 비명을 터뜨렸다. 외할머니가 탁자에 걸터앉아 요염하게 허리 돌리기를 하고 있었다. 덕지덕지 바른 립스틱이 뺨과 턱으로 번져 마치 피를 잔뜩 빨아 먹은 흡혈귀 같았다.
“이건 아니야! 어떻게 좀 해 봐, 제발!”
파비앵은 이포의 손을 꽉 잡았다. 이포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백신 프로그램이 어서 손상된 시스템을 치료해서 원래대로 복구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중략)
“기다리라고? 미쳤구나! 심각한 거 안 보여?”
“미안해, 친구. 안됐지만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야. 지금 백신 프로그램은 세계라는 거대한 컴퓨터를 체계적으로 검사하고 있거든. 아주 오래, 그러니까 며칠 혹은 몇 년이 걸릴지도 몰라.” --- pp.105~107
*파비앵의 선택
시스템 복원을 통해 시간을 거슬러 온 파비앵은 평온한 일상을 되찾은 것에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요술 노트북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언제든 다시 위험에 빠져드리라는 두려움을 지울 수 없다.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깨달은 파비앵은 노트북을 부수어 버리기로 결심한다.
세상에는 그리 나쁜 일만 있는 게 아니었다. 몇 시간 동안 가만히 누워 고독을 즐기는 것도, 아무 말 없이 다프네와 산책을 하는 것도 모두 다 좋을 것이다…….
그런데 퍼뜩 한 가지 숙제가 떠올랐다.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할 숙제였다. 몹시 고통스런 일이지만, 이대로 미루는 것은 지혜로운 해결책이 아니었다. 이포에게는 몹시 미안하고 죄스러운 일이었다. 파비앵은 평생토록 가슴이 아플 터였다.
파비앵은 벌떡 일어나 크고 묵직한 돌덩이를 하나 주워 들었다. 수백만 시간을 품은 돌……, 세월의 심연에서 솟아 나온 돌이었다. 파비앵은 그 돌을 최대한 높이 들어 올렸다. 노트북
이 파괴되면 위협도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포가 먼저 파비앵의 마음을 읽었다.
“나는 너를 이해해. 파괴해 버려. 그런데…….”
“그런데?”
“노트북을 부수면 나도 사라져. 뭐, 미련은 없어. 그동안 지니의 삶을 실컷 즐겼으니까. 무엇보다 너하고 친구가 되어서 정말로 기뻐.”
파비앵은 눈을 질끈 감았다. 끔찍한 영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평생 이 영상들이 불쑥불쑥 되살아날 것만 같았다. 괴물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사람들, 허공에서 무참하게 추락하는 기차, 쓰러지고 무너지는 집들……. 파비앵에게는 인류를 그런 위험에 빠뜨릴 권한이 없었다. 눈을 지르감고 돌덩이를 힘껏 내리쳤다.
--- pp.138~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