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는 태자로서 궁중에서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호화와 사치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17세에 콜리야 족의 야쇼다라와 결혼했고, 아들 라훌라(ⓢ r?hula)를 낳았다.
훗날 붓다는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부왕은 나를 위해 여러 채의 궁전, 그러니까 봄 궁전과 여름 궁전과 겨울 궁전을 지었으니, 나를 즐겁게 잘 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
네 사람이 나를 목욕시키고는 붉은 전단향(?檀香)을 내 몸에 바르고 비단옷을 입혔는데, 위아래와 안팎이 다 새것이었다. 밤낮으로 일산을 내게 씌웠으니, 태자가 밤에는 이슬에 젖지 않고, 낮에는 햇볕에 그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집에서는 겉보리나 보리밥, 콩국이나 생강을 최고의 음식으로 삼았으나 내 아버지의 집에서는 가장 낮은 하인도 쌀밥과 기름진 반찬을 최고의 음식으로 삼았다. (…)
여름 4개월 동안은 정전(正殿) 에 올라가 있었는데, 남자는 없고 기녀(妓女) 만 있어 내 멋대로 즐기면서 아예 내려오지 않았다.
내가 동산이나 누각으로 갈 때는 선발된 30대의 훌륭한 기병들이 행렬을 이루어 앞뒤에서 호위하고 인도했으니, 다른 일이야 어떠했겠는가. (…)
나는 다시 이렇게 생각했다.
‘나도 병을 여의지 못하면서 병자를 꺼리고 천하게 여기며 사랑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하다. 나도 병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찰하자 병들지 않았다고 해서 일어나는 교만이 산산이 부서졌다. (…)
나는 다시 이렇게 생각했다.
‘나도 늙음을 여의지 못하면서 노인을 싫어하고 천하게 여기며 사랑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하다. 나도 늙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찰하자 늙지 않았다고 해서 일어나는 교만이 산산이 부서졌다.
-『중아함경』 제29권, 「유연경(柔軟經)」
--- p. 11~12
붓다는 다시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연못에는 푸른 연꽃, 붉은 연꽃, 흰 연꽃이 있고, 그중 어떤 것은 물속에 잠겨 있고, 어떤 것은 물에 뜨고, 어떤 것은 물 위에 솟아 있듯이, 사람들의 능력이 다양하다는 것을 관찰하고는 설법하기로 했다.
그러면 누구에게 처음으로 설할 것인가?
붓다가 출가해서 왕사성에서 가르침을 받은 수행자들을 생각했으나 그들은 이미 죽고 없었다. 오랫동안 생각한 붓다는 예전에 우루벨라에서 함께 고행한 다섯 수행자에게 설하기로 결심하고, 그들이 있는 녹야원(鹿野苑)으로 향했다. 우루벨라에서 녹야원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250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이다.
붓다가 그들에게 처음으로 설한 가르침은 4성제(聖諦)였다.
--- p. 18
싯다르타는 보리수 아래서 4성제를 깨달아 붓다가 되었고, 4성제를 깨달았기 때문에 여래?응공이라 하고, 4성제를 깨달아 등정각을 이루었다.
4성제를 4제(諦)라고도 하는데, 제(諦)는 ⓢ satya ⓟ sacca의 번역으로 ‘진리’라는 뜻이고, 성제(聖諦)는 ‘성스러운 진리’, ‘성자의 진리’라는 뜻이다. 4성제는 괴로움을 소멸시켜 열반에 이르게 하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로, 고성제(苦聖諦)?집성제(集聖諦)?멸성제(滅聖諦)?도성제(道聖諦)이다.
붓다가 “비구들아, 예나 지금이나 내가 가르치는 것은 단지 고(苦)와 그 고의 소멸일 뿐이다”(『맛지마 니카야』 22, 「뱀의 비유경」)라고 했듯이, 불교는 고에서 시작해서 고의 소멸, 즉 열반으로 마친다.
--- p. 19
장마철이 거의 지나갈 무렵, 병에서 회복한 붓다가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을 때, 아난이 곁에 앉아 “세존께서 병이 깊어 심한 고통을 당하실 때, 저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세존께서 교단에 대해 아무런 유언도 없으셔서 아직 돌아가시지 않을 것이라 여겨 안심했습니다.”(『디가 니카야』 16, 「대반열반경」)라고 말했다. 그는 붓다가 입멸(入滅)하기 전에 교단의 후계자를 지명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붓다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교단이 내게 바라는 것이라도 있느냐?
만약 어떤 이가 스스로 ‘나는 교단을 거느리고 있다, 나는 교단을 다스리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교단에 대해 할 말이 있겠지만 여래는 ‘나는 교단을 거느리고 있다, 나는 교단을 다스리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어찌 교단에 대해 할 말이 있겠는가.
아난아, 나는 설해야 할 가르침을 안팎으로 이미 다 설했지만 ‘보이는 것에 모두 통달했다’고 자칭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는 이미 늙어 나이가 80이다. 낡은 수레를 수리하면 좀 더 갈 수 있는 것처럼 내 몸도 그러하다. (…)
아난아, 스스로 맹렬히 정진하되 가르침에 맹렬히 정진하고 다른 것에 맹렬히 정진하지 마라. 스스로 귀의하되 가르침에 귀의하고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마라.
--- p. 109~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