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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수금

붉은 수금

[ 양장 ] 미도리의 책장-11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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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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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9년 09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212쪽 | 405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01100067
ISBN10 8901100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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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페셔널답게 건조한 달관이 특히 사무카와 씨의 말에 감돌았다. 그런 세계에서 자신 또한 빛을 발해왔다는 긍지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일찍이 이르러보지 못한 경지였다. 이상할 정도로 자만했던 20대의 나는 별 대단한 레이아웃으로 장식해주지도 못하면서 타인의 작품인 글과 사진을 흠잡아 편집자에게 불쾌한 표정을 짓게 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주어진 재료에서 하자를 발견하면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아무도 완벽하지는 않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 p.46

강풍을 맞아 줄기가 휜 나무를 뇌리에 그리면서 바람만 잔잔해지면, 바람만, 하고 되뇌어왔다. 10년을 되뇌었다. 가혹한 노동, 끝없는 경제적 불안, 빈곤한 인맥조차 질투하고 공격적으로 나오는 사람들. 나에게는 직업이 있다. 자립했다. 사무소를 유지하고 있다. 자그마한 긍지를 식량 삼아 세간에 맞서 싸워온 줄 알았는데, 정신이 들어보니 허세를 부릴 상대도 없었다. 대신 빚이 있고, 여기저기 덜걱거리기 시작한 육체가 있고, 닳아서 감동하지 못하게 된 혼이 있었다. 줄기는 이미 오래전에 부러진 것이었다. --- p.109

V자형의 커다란 수금은 고스케가 나에게 둔 라이어와는 비슷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둘 다 붉은 수금이라는 사실, 혹은 머리에 메아리치기 시작한 ‘붉은 수금’이라는 말이 나에게서 냉정함을 빼앗았다. 백 몇 십 년 전 그림에 시인의 머리, 붉은 수금, 그것들을 나른하게 내려다보는 여자가 그려져 있었다. 얼굴이 갸름한 이 처녀는 할머니와 나를 겹친 이미지가 아닐까 싶고, 동시에 사무카와 겐지와 고스케가 이 역시 2중 노출된 사진처럼 윤곽은 흐릿한데 군데군데 초점이 맞는 한 장의 그림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 p.135

“일 같은 거, 본인이 행복해지기 위한 수단인 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하지만 사토루코 씨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겠죠. 그 주장을 굽히는 일도 없겠죠. 그렇기 때문에 제 못된 부분을 안심하고 내보일 수 있는 거예요. 전 모든 게 수단이거든요. 일도 그렇고, 연애도 따지고 보면 결국 자기가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수단이라고요. 이런 사고방식이 몸에 밴 건 분명히 사토루코 씨 같은 재능이 없기 때문일 거예요. 그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도 있거든요. 악기 장인을 좋아한다. 같이 있고 싶다. 안기고 싶다. 안고 싶다. 있죠, 그럼 왜 그렇게 되도록 행동하지 않는 거죠? 그래 봤자 연애잖아요.” --- p.158

좋아하게 된 것은 내 잘못이지만 내 마음을 끌어당긴 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책임을 물을 수 있으랴. 몰아세울 수 있으랴. 손수건을 코에 갖다댔다. 어째서 눈물샘은 콧구멍과 이어져 있는 걸가. 그는 세상물정 모르는 왕자처럼 내 구두를 주워 이 구두 당신 것이지, 라고 나에게 말하고, 그리고 두 사람은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행복하게, 행복하게, 행복하게, 행복하게, 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나. 바다 위에서 일기만 날아온 할머니와 바다 위에서 미래가 없는 마음을 고백받은 나는 어느 쪽이 더 허무할까. 그러나 고스케는 겐지가 아니었다. 겐지의 손자조차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마치 예정됐던 것처럼, 마치 전철을 밟는 것처럼…….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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