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언어도 7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말로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전한다면, 상대편이 과연 그 메시지를 받아들일지 장담할 수 없다. 우리 교회들은 우리만의 언어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데 숙련되어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우리가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느끼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해, 교회는 때로 사람들이 하나님과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했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문화의 다양한 언어들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문화 가운데서 교회의 역할을 조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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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에 참여하는 문제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교회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교회 리더들에게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다른 채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전혀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실, 예수님은 제자도의 본을 보여 주시면서, 문화의 주된 채널들을 이해하는 것과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어떤 언어든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분은 어업(베드로), 정치(마태), 심지어 지역 언론(“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요 4:29)에도 접근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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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 보자. 그리스도와 기독교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그리스도는 인격이시다. 그리고 어떤 이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면, 그분의 영에서 나는 향기를 결코 혼동할 리 없다. 한편, 기독교는 세상의 구원자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주장하는 하위문화의 명칭이다. 최소한 비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를 이렇게 이해한다. 때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와 그럭저럭 비슷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하위문화로서, 우리에게서는 대체로 일반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냄새가 난다. 이혼에 대한 통계도 마찬가지다. 직장에서의 행동도 더 거룩하지 않다. 교통 상황에서의 평판도 별로 좋지 않다. 사실, 지구를 돌보는 것이나 우유병 재활용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아마 전국 평균보다 낮은 점수를 기록할지도 모른다.
이는 좋은 뜻으로 뭔가를 행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공통된 오해를 우리에게 지적해 준다. 신자들은 대개 기독교라는 하위문화를 보급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하위문화가 우세해지고 문화에 널리 수용될 때, 우리는 그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한 그리스도인이 선거에서 당선되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위풍에 대해 뿌듯해한다. 한 운동선수가 큰 승리를 거둔 후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면, 우리는 내심 우쭐해진다. 그리고 복음이 주류 미디어에서 흘러나올 때, 우리는 지구상에서 우리의 임무를 거의 완수한 것처럼 느낀다. 그러한 사건들이 찬양의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국가나 울타리를 친 공동체나 다른 어떤 하위문화를 만들라고 부르심을 받지 않았다. 우리는 제자를 삼으라고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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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실상 우리의 모든 육신적 필요들은 월마트나 모퉁이의 식료품점에서 충족될 수 있다. 매일의 생존을 위해 굳이 다른 이들과 엮일 필요는 없다.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더 이상 자연스러운 경향이 아니다. 사실, 사회화된다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다. 직장에서 고된 일에 시달리며 혹은 집에서 아이들과 씨름하며 하루를 보낸 뒤에, 누가 이웃을 위해 사교적인 가면을 쓰고 싶어하겠는가? 책을 읽거나 TV를 보는 쪽으로 마음이 끌리는 것이 당연하다.
공동체를 피하는 또 다른 이유는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과거에 공동체에 속해 본 경험이 있다. 우리는 공동체에서 지원받고 인정받는 대신, 서먹함과 거부감, 환영받지 못함을 느꼈다. 그 결과, 그런 부정적인 경험들을 따라 반응하게 된 것이다. 즉 뒤로 물러난다. 어차피, 그렇게 하는 편이 더 쉽다. 무엇 때문에 감정적으로 상처받는 위험을 무릅쓰겠는가?
오늘날의 관계는, 고난과 생존의 시련을 통해 단련된다는 개념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원시 문화와 같은 과거 세대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어려움을 드러내고 다른 이들과 함께 겪어 내는 것이 지금보다 더 쉬웠다. 개인의 근심을 ‘나눈다’는 개념은 부적절했는데, 왜냐하면 전 공동체가 대부분의 이슈들을 현실적인 부담으로 공유했기 때문이다. 서로 지지해 주는 깊은 관계는 그러한 생존 공동체의 자연적 부산물이었다. 특히, 서로를 온전히 알고 있는 경우, 사람들은 깊이 뿌리내린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데서 오는 치유와 지원이라는 유익을 경험했다. 오늘날, 우리의 교제는 사회적 호기심이나 취미의 부산물이 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필연에 따라 태어난 존재라기보다는, 처분 가능하고 피상적이고 미심쩍은 존재로 여겨지는 것 같이 보인다. 우리의 사회적 네트워크는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포함시키고, 더 넓은 지리적 범위를 아우른다. 하지만 이러한 네트워크 안에 있는 관계의 깊이는 얕아지고 있다. 우리는 다방면의 많은 사람들과 알고 지낼 수는 있지만, 우리를 온전히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