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6장 19절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를 보면 부자는 구원받을 기회를 상실합니다. 즉, 지옥에 떨어진 부자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구원받을 기회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5장 12절 이하에 나오는 탕자는 타락했지만 살아 있었기 때문에 회개의 기회, 은혜받을 기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구원과 회개, 그리고 은혜는 살아 있을 때 받는 것입니다. 사람도 육체를 벗고 나면 그 상태가 천사와 같아지기 때문에 타락한 천사가 구원을 받지 못하듯 죽어버린 인간의 영혼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은혜는 살아 있을 때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자신이 죄인이고 형편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살아 있다는 것은 황홀한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욕심으로 가득 찬 삶을, 회개하고 은혜받고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_15쪽
가인은 죄를 다스려야 하는데 분이 죄를 다스리는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가인은 아벨을 들로 데리고 가서 살인을 저지릅니다. 분의 결과는 결국 무엇으로 나타났습니까? 마귀가 분을 틈타고 들어와 살인이라는 죄를 범하게 한 것입니다. 만약 가인이 분을 참을 줄 알았더라면, 한 생명을 살렸고 성경 속 역사에까지 그렇게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기록인데, 그는 가인이 성질나서 동생을 죽인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보는 각도가 달랐습니다.
_25~26쪽
분노하는 사람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문제의 원인을 자기가 아닌 남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일명 핑계를 대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먹었습니다”라고 해야 하는데 아담은 “여자가 줬는데요”라고 핑계를 대고 하와는 “뱀이 그랬는데요”라고 핑계를 댑니다. 하나님 스타일은 “내 탓이요, 내 책임이요” 하는 것이지만, 마귀 스타일은 “네 탓이요, 네 책임이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스타일입니까?
부부가 다음 날 새벽예배에 가자고 약속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둘 다 늦게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부부는 “아유, 피곤해서 못 일어났네, 왜 안 깨웠어?”라고 서로에게 핑계를 댑니다. 누가 깨워줘야 합니까? 각자 일어나야지….
우리는 변명하지 말고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하나님 스타일로 바꿔야 합니다. 설령 누가 나를 유혹해서 문제가 일어나더라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립시다.
_26~27쪽
우리의 삶 속에서도 분명히 자신을 괴롭게 하고 신경 쓰게 하고 눈에 가시처럼 느껴지는 라이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라이벌을 지금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실패한 사람처럼 너무나 괴로워하고 오히려 더 기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미워하며 시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그 사람이 진짜 나의 라이벌인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자신의 좁은 소견으로 라이벌이 아닌 사람이 라이벌이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처럼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더 기도하고 하나님을 더 바라보고 라이벌을 포용하고 용서하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야 성숙하고 발전하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_50쪽
즉,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 하신 일을 하고 그것보다 큰 일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보면 똑바로 살아온 것 같으면서도 뒤돌아보면 갈지자입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갈지자로 살아온 줄 알았는데 뒤돌아보면 똑바로인 경우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인생을 보는 시각입니다.
_65쪽
사람이 돈이 없는 것은 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돈 버는 재능을 계발하지 못했거나 쓸데없는 곳에 다 썼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공부를 못하는 것은, 공부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 방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도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입니다. 내 능력을 믿으십시오. 내게 능력을 주신 주님을 믿으십시오.
인류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에덴동산과, 지금의 차이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에덴동산은 비교의식 속에서 오는 열등감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섯 개면 어떻고, 두 개면 어떻고, 하나면 어떻습니까. 그저 감사하고 순종하고 살면, 그게 축복이고 그게 재미지. 그게 구원이고 칭찬입니다.
_80쪽
예나 지금이나 어설픈 인간의 지식이 하나님의 은사를 멸시하고 혹 잘못 은사를 사용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 전체를 부정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 교회에 희한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묻고 싶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변화도 없고 아무 능력도 없고, 은사도 없고, 열매도 없다면 기독교가 세상 종교와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이러한 요소가 모두 사라졌을 때 기독교는 세상의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진짜와 가짜가 같을 수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과 세상 사람은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과 예수 믿는 사람이 같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속에는 성령이 계시고 세상 속에는 세상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이 똑같다면 둘 중의 하나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_87쪽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인간의 진화론적 지식으로 접근하면 안 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인간의 상식으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저 죽음 앞에 속수무책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도 석가모니, 공자, 마호메트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성자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인간론적으로 접근하니 그리스도를 4대 성인 중 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활로 접근하면 오직 그분만이 성결하신 분이요, 죄가 없으신 분이요,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_99쪽
예나 지금이나 어설픈 인간의 지식이 하나님의 은사를 멸시하고 혹 잘못 은사를 사용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 전체를 부정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 교회에 희한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묻고 싶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변화도 없고 아무 능력도 없고, 은사도 없고, 열매도 없다면 기독교가 세상 종교와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이러한 요소가 모두 사라졌을 때 기독교는 세상의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진짜와 가짜가 같을 수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과 세상 사람은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과 예수 믿는 사람이 같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속에는 성령이 계시고 세상 속에는 세상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이 똑같다면 둘 중의 하나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_256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