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삼미종합특수강과 삼미정공에서 일하다가 1988년 [한겨레]로 옮겨가 기자가 됐다. 이후 [한경닷컴] 취재부장 등을 거쳐 [아시아엔]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고전, 내 마음의 엘리시움》(2007년), 《세계 금융위기와 그 후》(2009년), 《미술작품을 곁들인 에피소드 서양문화사》(2014년)가 있고, 번역한 책으로 《한눈에 보는 지구촌 경제》(1994년), 《바보 여신의 바보 예찬》(2011년)이 있다.
삽화 : 귀스타브 도레(Paul Gustave Louis Christophe Dore, 1832~1883)
프랑스의 삽화가이자 화가, 조각가, 판화작가. 기독교 성서와 단테의 《신곡》을 비롯한 서양 고전의 내용을 소재로 한 삽화 작품을 많이 남겼다. 평생 독신으로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작품활동에 전념했다.
배신자의 영혼이 지옥의 가장 하부에 배치된 데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고 여겨진다. 고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는 “친구의 것은 공유”라는 격언이 통용될 만큼 우애가 중시됐거니와 아리스토텔레스도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애’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했다. 무절제보다 우애가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만큼 우애를 거스르는 행위를 다른 어떤 죄보다 더 무거운 죄로 여겼다. 단테도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우애를 저버린 행위, 즉 배신을 엄중한 죄로 다룬 것으로 생각된다. (121쪽)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성직매매자들을 뒤로 하고 다음 구렁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는 눈물지으면서 기도하듯 걸어가는 무리가 보였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목과 턱이 뒤로 돌려져 있었다. 얼굴이 앞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뒤쪽을 향하고 있으므로 뒷걸음치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엉덩이를 적셨다. 그들은 살아있을 때 예언자 행세를 하거나 점쟁이 노릇을 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앞날의 일을 내다보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뒤를 바라보며 거꾸로 걸어가야 한다. (180쪽)
단테는 영혼들 사이를 지나가다가 본의 아니게 누군가의 머리에 발을 부딪쳤다. 그곳은 영원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으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당한 사람은 “왜 나를 치는가?”라고 따져 물었다. 그는 궬프당에 속했던 피렌체 사람으로, 궬프당과 기벨린당이 결전을 벌인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배반행위를 한 자였다. 알고보니 그곳은 조국을 배반한 인간들의 영혼으로 채워진 제9원의 두 번째 구역 안테노라였다. (256~7쪽)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짙은 연기가 덮여 있는 셋째 둘레로 들어간다. 그곳은 영혼들이 분노의 매듭을 푸는 곳이었다. 지옥편 제7곡에 나오는 분노의 죄인들은 구제받을 수 없지만, 이곳의 영혼들은 분노의 죄를 씻어내고 있다. 이들의 영혼은 아직은 덜 정화되어 있고, 자욱하게 덮여 있는 연기가 이들이 하느님의 빛을 볼 수 없게 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그 죄를 씻어내기만 하면 하늘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이들은 연기 때문에 어두운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어린 양”을 부르며 기도하고 있었다. (362쪽)
단테가 베아트리체와 함께 천국을 여행하기로 결심하고 하늘로 오르자 몸이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신성한 왕국, 즉 하느님의 나라에 가보고 싶은 갈망이 단테와 베아트리체 일행을 빠른 속도로 올라가게 했다. 그 빠르기는 인간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일이라서 콜키스의 영웅들이 밭을 가는 이아손을 봤을 때보다 더 놀라야 할 것이라고 단테는 묘사한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한다면, 빛의 속도보다도 빨리 올라갔을 것이다. (471~2쪽)
단테가 본 그 고귀한 빛의 깊고도 맑은 ‘실체’ 속에 빛깔이 서로 다른 세 가지 원이 나타났다.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원이었다. 그 가운데 한 원에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단테는 정신을 집중하고 그 원을 바라보았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단테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별안간 단테의 마음에 하나의 섬광 같은 것이 스쳤다. 단테는 알고 싶어 하던 것을 깨닫게 됐다. 그동안 자신의 지성과 상상만으로는 얻지 못한 깨달음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사랑에 의한 것이었다. (6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