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연극을 읽는다!
상상의 블랙박스를 여는 네 작가의 ‘희곡 창작 프로젝트’
“희곡은 무대에 올라가는 순간 공연 예술이 되지만,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는 분명히 문자 예술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서고금의 많은 시인과 소설가들이 자신의 문학적 표현 수단을 새로이 개척하거나 성취 수단의 연장으로 희곡 쓰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위대한 전통에 이번 희곡집에 작품을 실은 네 분을 추가합니다.”--- 장정일, 「프롤로그 ― 사건을 무마하기 위하여」 중에서
이제 연극을 읽는다! ― 이매진 드라마톨로지, 제1권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 출간
하일지·정영문·서준환·김경주, 네 작가의 희곡 작품이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평소 희곡에 대한 애정을 과감히 드러내고 다니던 장정일과 김경주가 엮어낸 작품이다. 전방위적 글쓰기로 다양한 층위의 독자와 소통하고 있는 장정일과 김경주. 두 작가는 앞으로도 기성, 신인 작가들에게 계속해서 희곡 쓰기를 권장할 것이고, 이 희곡집은 ‘이매진 드라마톨로지’라는 이름의 시리즈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문장이 좋다고 손꼽히는 작가들이 이미 이 대열에 함께하기 위해 줄을 서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드라마는 어떤 무대를 예상하게 하는 극문학이다. 서술적이지 않은 대신 행위의 형식을 모방하는 완성도 높은 문학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희곡은 시나 소설에 밀려, 문학이라는 장르피라미드에서 하위에 머무르고 있다. 질 좋은 희곡이 발표될 지면도 없고, 발표된다고 해도 서평 한 번 실리지 못하는 현실. 이런 문제 의식에 동감한 작가들이 희곡 쓰기의 중요성과 즐거움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희곡은 작가들 자신의 표현 양식과 지평을 넓히는 일이다. 질 좋은 희곡이 문학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길을 내주고, 또 문학적인 글로 끝나지 않고 열려 있는 무대를 통한 공연으로도 이어져, 작품은 또 희곡으로서 독자적인 가치를 높여 갈 것이다. 이매진 드라마톨로지는 그런 노력의 시작이다.
소설가·시인, ‘희곡’이라는 다양한 질감의 글쓰기로 한국 문학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다
우리는 괴테, 셰익스피어, 베케트, 브레히트 등 세계의 거장들이 남긴 ‘희곡’ 작품을 경험했고 또 경험하고 있다. 이 작가들의 희곡은 그 화려한 문장뿐 아니라 날이 선 현실 인식과 무대에서 표현 가능한 물성의 감각을 통해 독자와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지금, 문학 경력의 첫 줄을 희곡에서 시작하지 않은 작가들이, 매번 해 오던 방식을 제쳐 두고, 희곡도 여러 가지 문학적 표현의 영역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한 가운데, 새로운 표현에 도전하면서 자신만의 시대 인식을 기반으로 해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확장하고 있다.
하일지의 작품 〈파도를 타고〉는 국가주의와 부조리한 현실이 싫어서 한국 땅을 떠나 망망대해를 떠도는 한 가족의 우스꽝스럽고 애달픈 표류기다. “제가 한국 사람이라는 게 싫어서지요”, “십오 년 동안 일해도 집 한 칸 살 수 없는 나라에서 독도가 우리 땅이면 뭐합니까”와 같은 거침없는 대사는 복음주의적 기독교와 부동산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낳고 있는 문제를 꼬집는다. 정영문의 〈당나귀들〉은 적군이 침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찌감치 왕이 도주해 버린 가상의 왕국에서, 한 나라의 방위를 책임진 장군·신하·학자가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옥신각신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 리더십이 실종한 한국의 정치를 연상하게 한다. 서준환의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는 성적 판타지를 파는 섹스숍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정치적 층위, 재현의 층위, 성별의 층위, 오브제의 층위 등 여러 각도에서 보여준다. 김경주의 〈블랙박스〉는 기내라는 극소화된 무대에서 물방울, 물웅덩이, 푸르고 비린 냄새, 떠다니는 눈, 교미 중인 구름 같은 비시각적이고 공감각적인 요소를 한껏 동원해서 독자와 관객들의 공간적 상상력을 우주로 넓혀 놓는다.
이 책을 계기로 독자들은 익숙한 작가들의 의식세계와 다시 한 번 만나는 기회를 갖는 한편, 달라진 작가들의 대화 양식을 만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