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점호라는 것이 자기의 수번과 이름만 복창하면 끝인데 배종호가 근무하는 작업장에서는 자기가 다루는 기계나 도구로 인해 다칠 수 있는 신체 부위를 끝에 붙였다. 가령 전기톱을 사용하는 재소자라면 〈1234번 홍길동 손가락과 눈알〉, 끌이나 조각도를 이용하는 자라면 이름 끝에 역시나 〈손가락〉을 붙였다. 처음 듣는 재경은 개그 같기도 하고 뜨악하기도 했지만 점호하는 당사자들은 진지하게 임했다. --- p.38
남자가 짧은 검을 칼집에서 내었을 때 칼날의 빛이 반사되어 이성환의 눈을 찔렀다. 이성환은 자기도 모르게 〈사장님〉 하고 부르며 그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았다. 당황한 그 남자가 피한다는 것이 이성환을 차는 꼴이 되었다. 이성환은 그의 발치에 외로 쓰러졌다.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하던 이성환은 분했다. 그 분노가 살의가 되기까지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남자가 탁자 위에 둔 짧고 날카로운 일본 검을 집어 들었다. 그 남자부터 찔렀다. 외제 차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난도질한 이 남자에게 그렇게 하고 싶었다. 〈사모님〉이라는 여자의 비명이 이성환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로 그 여자의 배를 찌르고 있는 이성환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관성의 힘으로 몇 번이나 찌르고 또 찔렀다. 그때 아들로 보이는 열 살짜리가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2층에서 내려왔다. 이성환의 눈에 그 아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살인을 증명할 목격자일 뿐이었다. 그래서 찔렀다. 관성의 힘은 참으로 무서웠다. 칼을 찌르는 이성환의 행동에 힘을 보태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몸에서 흐르는 붉은 피는 시내를 이루며 흘러갔다. --- pp.60~61
「쓰레기가 안 넘치게 꾹꾹 밟아야 하는 게 우리 일이야.」
「전 쓰레기 치우는 청소부로 일하는 게 아닙니다. 교도소가 휴지통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아, 그러셔? 그럼 뭐 할까? 아, 맞다. 더러운 새끼들 빨아 주는 세탁소 할래?」
「전 그냥…… 교도관입니다.」
「그래 교도관. 니 목에 칼 대는 쓰레기들을 매일 만나야 하는 교도관. 누가 아니래?」
「…….」
「그것들이 쓰레기란 걸 잊어버리는 순간…… 니 목에 언제 칼이 꽂힐지 몰라. 대신 쓰레기를 겁내선 안 돼. 내 말 명심해.」 --- pp.94~95
재소자들 중에는 교도관의 옷을 벗겨 죄수복을 입히려는 자들이 꽤 된다고 했다.
교도관에게 시비를 걸어 많은 사람 앞에서 폭력을 유도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자해를 한 후 교도관에게 덮어씌우는 자, 영치금을 떼어먹었다고 고소하는 자, 담배 장사를 하라고 부추겨 놓고 그걸로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자, 정보 공개법을 이용해 맘에 들지 않는 교도관에게 하루에 수백 장씩 복사를 요구하는 자, 배종호가 뱉어 놓는 실례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재경은 자신이 지뢰투성이의 동굴 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 p.102
「집행.」
빨간 버튼 세 개가 동시에 눌러졌다. 처음에 났던 덜커덩 소리와 함께 마루가 꺼지며 목에 밧줄이 걸린 마네킹이 밑으로 툭 떨어졌다.
꺼진 교수대 마루 밑을 보기 위해 집행조 교도관 모두가 몰려들었다. 밧줄에 매달린 마네킹을 보자 착잡해지는 마음은 어쩌지 못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내려다보기만 했다. 지하실 밑으로 전부 가라앉을 정도로 공기의 무게가 무거워져 갈 때쯤 양 교도의 생뚱맞은 소리가 무게를 덜어 냈다.
「근데…… 목이 부러져서 죽는 거야…… 질식해서 죽는 거야?」
재경도 뭘까 궁금해하는데 장 교도가 빈정거리며 나섰다.
「궁금하면 니가 직접 해보든지…….」
「내가 왜? 니가 해라.」
「궁금한 놈이 해야지, 임마.」
「그만하세요. 부러지든 질식이든 똑같잖아요, 죽는 데는.」
「그건 그렇다.」 --- pp.178~179
「재미있지? 사람 죽어 나자빠지는 거 보니까. 이렇게 재미있는 구경을 왜 니들만 해. 광화문 네거리에서…… 밴드도 부르고…… 폭죽도 쏘고…… 방송도 해야 할 거 아냐. 」
소장은 불편한 심기를 명령으로 나타냈다.
「말 끝난 것 같은데, 집행하지.」
배종호와 재경은 빠르게 포승줄을 들고 장용두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살인한 거는 뉴스에 그대로 다 나갔잖아. 내가 죽인 시체도 빤빤히 다 보여 주데. 그런데 니들이 살인하는 건 왜 안 내보내.」
당황하는 재경이 포승줄을 놓치며 버벅이자 배종호는 거칠고 단호하게 그를 묶어 나갔다. 몸부림치는 그를 재경과 배종호가 힘겹게 교수대 의자에 앉혔다. 장용두의 조롱은 끊이지 않았다.
「이제 난 못 죽이지만, 니들은 계속 더 죽이겠지.」
장용두의 얼굴에 재경은 빠르게 용수를 씌웠다.
배종호는 천천히 내려오는 밧줄을 힘껏 잡아당겨 그의 목에 걸었다.
소장은 숨 쉴 겨를도 주지 않고 집행므 외쳤다. 그와 동시에 장용두는 발악적으로 끝까지 사람들을 후려쳤다.
「이 살인자들아.」 --- p.227
의무관의 신호로 장용두에게 다가가던 배종호와 재경은 다시 살아난 듯이 꿈틀거리는 그를 보자 선 채로 몸이 굳어 버려다. 재경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나 배종호는 빠르게 달려가 장요우의 다리 아래를 잡아채었다.
「이 새끼야, 뭐 해. 와서 당겨!」
배종호의 재촉에 못 이겨 재경은 눈을 질근 감고 장용두의 다리로 달려들었다. 배종호가 발쪽을 잡고 있어 재경은 허벅지를 부둥켜안았다. 장용두는 계속해서 퍼덕였다. 그 몸의 떨림이 재경의 손으로, 어깨로, 온몸으로 그대로 전달되었다. 장용두의 퍼덕거림과 숨통 끊어지는 소리가 더해지자 재경은 하얗게 질려 갔다. 이에 반해 배종호는 발악하듯 소리를 질러 댔다.
「이 새끼야, 빨리 안 당기고 뭐 해!」
재경은 얼결에 장용두의 허벅지를 잡아당겼다. 순간 재경의 손을 타고 누런 액체가 흘러내렸다. 사람의 분비물에서만 나는 고약한 냄새까지 동반되었다. 장용두의 항문 괄약근이 풀려 저절로 새어 나온 배설물이었다. 재경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병신 같은 새끼라는 욕지기자 배종호의 입에서 몇 번이나 튀어나왔지만 재경은 꼼짝을 할 수 없었다.
혼자 장용두를 잡아당기던 배종호의 얼굴 위로도 배설물이 슬슬 덮치며 내려왔다. 사람의 몸 안이나 변기 속에만 있어야 하는 누런 액체는 배종호의 얼굴 전체를 온전히 채웠다. 재경은 속에서 치고 올라오는 구토를 참을 수가 없었다.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속에 것을 게워 내기 시작했다. --- pp.250~251
「왜…… 왜 하필 오늘이야? 왜?」
재경이 마지막 말을 집이 울릴 정도로 내지르자 은주는 뒤로 물러날 만큼 소스라쳤다. 재경은 주먹을 움켜잡았다. 그렇지 않으면 은주를 칠 수도 있다는 경고음이 머릿속에서 울려 댔다.
「왜 그랬어, 도대체 왜? 너까지 그럴 필요 없었잖아. 나 혼자만 해도 미쳐 버리겠는데, 왜 그랬어, 왜, 왜?」
재경의 흰자위에 핏발이 섰다. 은주가 말릴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소리소리 쳐댔다.
「그래, 죽이고 오니 좋대? 기분이 어땠어? 그래도 나보다는 낫겠네. 한 명밖에 안 죽였으니. 난 오늘 네 명이나 죽였어. 그것도 몇 시간 만에…… 웃기지? 그중에 두 명은…… 눈만 뜨면…… 교도소만 가면, 얼굴 맞대던 사람을…… 이 손으로…….」
재경은 그의 두 손을 은주의 목전에 가져다가 쫙 폈다.
「이 두 손으로 밧줄 걸었어. 니가 알기나 해? 뭣도 모르잖아. 그런데 애를 뗐다고. 넌, 넌…… 정말…… 못된 여자야.」
--- pp.249-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