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쇼를 관람하러 온 각국의 군 관계자와 사업가들이 모두들 고개를 내밀고 활주로를 주시하고 있을 때쯤, KT-1은 어느새 힘차게 땅을 박차고 이륙했다. 짧은 거리에서 이착륙이 가능한 KT-1에게 창이공항의 활주로는 너무 길었다.
"와아!"
KT-1의 단거리 이륙에 이은 급상승 기동에 관람객들이 탄성을 지를 때쯤, 짙은 코발트 색 하늘에 떠오른 작고 단단한 하얀 항공기는 어느새 공중에서 첫번째 기동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반경을 그리며 행사장 상공을 향해 날아오는 급선회 기동에 이은 수직상승기동이 펼쳐지자 관람객들은 날렵한 KT-1의 비행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끝간데 없이 하늘을 오르는 KT-1의 하얀 동체가 눈부신 태양을 등지고 한 순간의 섬광으로 비치자 미처 선글라스를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손그늘을 만들며 눈으로 항공기의 궤적을 쫓기에 바빴다.
하나의 도시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나라 싱가포르는 영공이 좁아서 에어쇼를 위해서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영공을 넘나들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에 내 것이 어디 있고 네 것이 어디 있으랴. 그 하늘을 나는 자가 진짜 하늘의 주인이었다.
이어 항공기는 수직으로 급상승하던 상태에서 살짝 고개를 숙이는 듯 하더니 실속(失速, stall)상태에서 기수를 살짝 돌리는 스톨 턴(stall turn) 기동을 선보였다. 지상의 사람들은 다음에는 무슨 기동을 하려나 싶은 마음으로 다음 동작을 예의 주시했다.
그때였다.
"오오!"
순간, 잠깐동안 배를 드러내고 거꾸로 뒤집힌 배면(背面)비행 상태로 머무르는가 싶던 KT-1이 뒤집힌 상태 그대로 나선형으로 회전하며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배면 스핀(spin)'이라 불리는, 항공기의 기동중에 가장 난이도가 높은 기동이었다. 마치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내팽개쳐진 것처럼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지상을 향해 날아오는 항공기는 스스로 힘으로 날 수 있는 통제력을 잃은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이 장면을 지켜보는 관람객들은 '저러다 항공기가 추락하는 게 아닌가'하며 눈살마저 찌푸렸다. 에어쇼 장면을 중계방송하는 스피커에서 요란스레 울리던 아나운서의 목소리도 순간 침묵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동안 이 장면을 수백번, 수천번도 넘게 봐 온 우리 관계자들도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넷......'
한 번 회전할 때마다 몇 천피트씩 고도가 떨어지는 KT-1을 보며 신 장군 역시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지상에서 보기에도 급속하게 강하하고 있는 항공기에서 조종간을 잡은 조종사들은 마치 지면이 눈앞에 닥쳐오는 것처럼 고도의 상실을 몸으로 체감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영원과도 같은 몇 초 후, 한없이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치던 항공기는 언제 그랬느냐 싶게 1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에 수평비행 상태를 회복하더니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일부러 배면 스핀 상태를 만들었던 조종사가 스핀 조작을 멈추자 마자 항공기가 스스로 비행자세를 회복했기 때문이었다.
관람석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야, 대단한데!"
"지금 저 훈련기가 곡예비행을 한 거 아냐?"
비행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우렁찬 박수를 보내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이어 항공기는 연속적으로 공중에 커다란 두 개의 원형을 그리는 더블 루프(double loop)를 선보였다. 다음 기동은 저속비행. 훈련용으로 쓰이는 항공기에 있어 가장 중요한 비행성능 가운데 하나였다.
이후 몇가지의 다양한 기동을 더 보이며 그 성능을 아낌없이 과시한 KT-1은 활주로로 진입, 무사히 착륙했다. 관람객들은 다시 한 번 힘차게 박수를 보내며 조종사들을 격려했고, 스피커에서는 흥분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행사장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KT-1은 대한민국 공군이 운용하고 있는 기본훈련기로, 대한민국이 직접 개발한 950마력의 터보 프롭 항공기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조종사들에게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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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뭐야?"
이 부장은 01호기에서 처음 무언가가 튀어 나왔을 때 캐노피의 트랜스페어런시(transparency, 캐노피를 이루고 있는 투명한 재질의 복합재)가 깨어져 나간 줄 알았다. 잠시 후 그 물체가 무엇인지 깨달은 이 부장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튀어나온 것은 뜻밖에도 전방석에 앉았던 조종사 정영식 소령이었다!
지휘소 부근 풀밭을 가로지르고 있던 이대열 팀장도 그 순간을 지켜 보았다. 사출된 조종석은 비행기의 진행방향과 가속도 때문에 지면과 사선 방향으로 떨어져 나갔다. 몇 초 후 기체에서는 또 다른 물체가 튕겨져 나갔다. 후방석에 타고 있던 백 대위였다. 백 대위는 정 소령보다 더 낮은 고도에서 사출된 데다가 지면을 향해 거의 일직선 방향으로 추락해 갔다. 이미 지상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죽었구나!'
차마 그 장면을 볼 수 없어 이 팀장이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거의 지상에 다다른 백 대위의 사출좌석에서 가이드 슈트(guide chute)가 펴졌다. 총알같이 떨어지던 좌석이 기우뚱하며 공중에 고정되는가 싶더니 곧 좌석은 분리되고 낙하산이 펴졌다. 조금 전 낙하산이 펴진 정 소령의 사출좌석은 아직 공중에 떠다니고 있었다.
잠시 후, 두 명의 탑승자를 잃어버린 채 배면상태로 급강하하고 있던 01호기는 무서운 속도로 가속이 붙으며 그대로 비행장 활주로 옆 잔디밭에 추락했다.
거대한 화염이 오렌지 빛을 띄는 듯 하더니 검붉게 변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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