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에 수치심을 느꼈다면 언젠가 등단은 할 것 같고요, 내 말에 분노를 느꼈다면 소설가가 되겠네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등단하면 소설가 아닌가. 그런데도 한동수라는 소설가의 입에서 나온 말이어선지 좀 다른 것 같았다. “등단은 해도 모두가 소설가로 살아가는 건 아니죠. 등단은 절차고 소설가로 살아가는 건 선택이에요. 운전면허증을 발급받고도 매일 운전 안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요.” 한동수는 타고난 독설가였다. 말할 때마다 독이 튀었다. 거침없고 게다가 도도했다. 믿기지 않는 것은 그런 모습이 재단한 옷처럼 그에게 너무도 잘 어울렸다. --- p.35
“(…)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위해 전부를 걸어보고 싶었어요. 그래야 가치 있는 일이 될 것 같았어요. 가치를 만들어나가는 일은 아름답죠. 내게 소설만큼 더럽고 아름다운 것은 없어요.” --- p.37
어찌 되었든 동수 선배는 안 쓰고 피터는 못 쓰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했다. 선배는 자의에 의해 피터는 타인에 의해. 그렇지만 그 경계도 모호했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타인이므로 자의는 타인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 p.176
“나는 네가 어두운 터널 속으로 기어들어가지 않은 것이 네 운명을 결정했다고 생각해. 네가 글이라도 쓰는 이유는 그때, 들어가보지 않은 어두운 터널에 대한 유혹 때문이었어. 유혹을 느끼면서도 차마 발을 떼지 못했던 순간의 감정이 너로 하여금 자꾸 다른 세계를 기웃거리게 하는 거야. 그게 네게는 소설이겠지.” “정말 그럴까?” “통과한 사람과 기웃거린 사람은 확실히 달라.” “그럼 선배는?” “나? 난 둘 다 해봤어.” “둘 다라고?” “그러니 안 쓰지. 못 쓰기도 하고.” --- p.204
선배가 ‘통과한 사람’과 ‘기웃거린 사람’은 확실히 서로 다르다고 말했던 것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고백하자면, 나는 기웃거리는 사람이었다. 뭔가를 온전히 몸으로 통과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슬픔도 분노도 늘 언저리에서 머물다 스스로 타협하고 말았다. 뭐가 두려웠던 것일까. 소설도 삶도 심지어 연애까지도 제대로 뛰어들고 피 흘린 적이 없었다. 끝까지 가본 적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나는 용기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 p.208~209
당신에게 안부를 전하는 많은 방법에 대해 생각했어. 섬세한 감정의 결을 전하는 데 글보다 더 뛰어난 도구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해. 그래서 다시 글이고 우리의 여기야. --- p.226
아마도 내게 소설이란 염원하면서도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란 어떤 이중성에 대한 고백인지도 모르겠다. 소설가는 자신의 일부이거나 전부인 이야기를 쓴다는 다자이 오사무의 말에 나는 언제나 고개를 끄덕인다. 삼 년 전 첫 책을 내고 비로소 소설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내가 쓸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소설을 쓰며 사는 삶에 대해서도. 아마도 이 소설은 그 시간들에 대한 내 고뇌와 그리움의 다른 말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