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는 것은 과학으로 나폴레옹을 ‘증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는 과학의 한계와 역사의 특성에 있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어떤 것을 증명하려면 반복실험이 가능해야 한다. 과학자가 딱 한 번 실험해보고 난 뒤에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고 세상에 공표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세상 아무도 태초로 돌아갈 수 없으며, 나폴레옹을 오늘날로 데려올 수 없고, 링컨의 피살사건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반복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사건들이 반복실험에 의해 ‘증명’될 수 없다고 해서 그 사건들이 실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_ 20쪽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세 분의 인격으로 이루어져있다. 그것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비밀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땅의 것들을 예로 그것을 설명해보려고 한다. 계란이 껍데기, 흰자, 노른자 이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예로 들기도 하고, 물이 고체, 액체, 기체의 상태로 변하는 것을 예로 들기도 한다. 그런 예들이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삼위일체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우리의 영광스러우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단순한 계란이나 물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으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한계가 없으며 우리로서는 그것을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다. 우리는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을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_ 27~28쪽
구약시대에는 사람들이 맹세를 할 때 자기보다 더 큰 존재를 걸고 맹세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 높고 큰 힘이 하나님이었다(참조 창세기 14:22, 21:23~24, 24:3). 그리고 그런 식으로 맹세한 사람은 반드시 그것을 책임지고 지켜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맹세를 하실 필요가 없었다. 그분은 진리 그 자체이시며 하나님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사 하나님이 맹세를 해주시지 않는다 해도 아무 의심 없이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맹세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보장해주셨다.
_ 52쪽
거룩하심은 하나님의 여러 가지 특징들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하늘의 천사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때 “영원하다, 영원하다, 영원하다” 또는 “신실하다, 신실하다, 신실하다” 또는 “지혜롭다, 지혜롭다, 지혜롭다”, “강하다, 강하다, 강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라고 말한다(요한계시록 4:8, 참조 이사야 6:3).
스테판 차녹은 자신의 저서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은 그분의 모든 특징 중에서도 면류관이 되는 특징이요, 하나님의 법령의 생명이며 하나님의 행동의 광채이며, 위엄이 있고, 존중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기록했다.
_ 67~68쪽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즉각 알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관한 지식은 물론이요, 광대한 우주 어느 한 구석에 존재하거나 존재할 수도 있는, 그리고 과거에 존재했던 또는 미래에 존재할 수도 있는 그 모든 것을 충분히 그리고 완벽하게 안다. 하나님은 모든 원인, 모든 생각, 모든 비밀, 모든 불가사의, 모든 느낌, 모든 갈망, 모든 나라와 권세, 모든 인간,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 전부 아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완전하게 알기 때문에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더 잘 알거나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완벽히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신다는 것이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은 절대로 놀라시지 않으며, 절대로 감탄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더 많은 정보를 원하시거나 질문하시지 않는다(선한 것을 해주기 위해 사람들을 이끌어주실 때를 제외하고). 하나님은 자존(自存)하시며, 자족(自足)하시며, 아무 피조물도 알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완벽하게 아신다. … 왜냐하면 무한한 존재만이 무한의 세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_ 89~90쪽
제자도의 성장에는 분별이 필요하다. 인생의 선함과 하나님의 은혜로만 얻을 수 있는 최선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행복과 기쁨, 세상의 찬사와 영적인 깊이, 일시적 성공과 진정한 영적 성장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잔이 차고 넘칠 때까지 기쁨과 사랑과 생명을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매우 진지한 계획을 갖고 계신다. 우리의 바람보다 훨씬 진지하실 때도 많다.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시적인 즐거움을 앗아가는 대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계발하신다.
_190~191쪽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스테판 차녹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하나님을 시간으로 측정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공간에 제한을 받? 않으신다. …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하며, 어떤 공간이든 다 채우지만, 포도주나 물이 그릇에 담기듯이 특정 공간 안에 갇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늘 저 높은 곳에서부터 저 깊은 바닥까지 세상 어디에나 계시며, 그 전체를 감싸고 계시지만 결코 그것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며, 세상을 뛰어넘는 분이다.
_ 112~113쪽
우리가 사는 이 우주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붙들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각 부분을 결합시키시는 결합의 원리이다. 하나님은 시계 기술자가 시계를 만든 후 그것이 자동적으로 잘 가면 그 다음에는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세상과 구분되어 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다. 우주가 카오스(혼돈)가 아니라 코스모스(질서, 조화)인 것은, 다시 말하면 우주가 오류와 온갖 예측할 수 없는 것들로 뒤죽박죽된 상태가 아니라 질서정연한 체계를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힘이 그것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_ 140쪽
하나님의 분노는 인간의 분노와 다르다. 화가 나면 우리는 기분이 나빠지고 자존심도 상한다. 그것은 인간의 악한 마음의 반영이다. 타당한 이유 때문에 화를 낼 때조차도 우리의 죄악성은 우리의 분노를 오염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식의 분노 개념을 하나님에게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분노는 순수하며 죄에 물들지 않은 상태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분노는 거룩함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거룩함은 죄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_ 161쪽
대부분의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말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세상에 일어나는 나쁜 일들을 보며 어떻게 하나님이 그런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는가 하며 의아해한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를 사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아담의 타락 때문에 하나님이 인류를 세상에서 멸하신다 해도 사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타당한 권리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우리는 숨 쉬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자비가 심판을 이긴 경우이다(야고보서 2:13).
_ 183쪽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정말 알고 싶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에 대해 했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말할 때 하나님을 “거룩하신 아버지”(요한복음 17:11)요, “의로우신 아버지”(요한복음 17:25)로 칭했다는 사실부터 생각해보자. 그리스도는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그의 유업을 빼앗으려 했다가 그 악한 농부들이 벌을 받았다는 비유에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말했다(마태복음 21:33~46).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가복음 10:27)라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말했다. 그리스도는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복음 6:10)라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말했다. 그리스도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라고 말했다(마태복음 6: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자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 은혜로운 아버지로 묘사했다(마태복음 7:9~11).
그러한 것들도 정말 놀랍지만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한 가지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어떤 다른 면모보다도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가장 강조했다.
_ 223쪽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