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욥입니다. 놀랍죠? 우리 모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고민을 애써 다른 것으로 치환합니다. 무엇으로 합니까? 이런 말해서 죄송합니다만 전도, 기도, 성경 읽기로 치환합니다.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로 도망갈 수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고민과 이 깊은 답, 자신을 깨고 하나님의 통치에 자신을 위임하고 안내를 구하고 붙잡아 달라고 싸워야 하는 이 도전에 직면한 자의 갈등과 고뇌를 허울 좋게 외면합니다.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사회적 책임, 시대적 책임, 국가적 책임을 말하는데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각 개인이 자신을 이해하고 인간과 인생을 이해하는 틀을 신앙적으로 확보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다만 도망가고 변명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 「01 고난, 하나님의 흔드심」중에서
신앙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자기 인격과 생애 속에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현실 속에서 구체화해야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구체화를 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규범과 표준이라는 말 속에는 시간과 과정이라는 것이 늘 배제되는데, 구체화를 하려면 반드시 시간과 과정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척하면 척’이 바로 됩니까? “너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해” 그러면 바로 훌륭해지고, “다시는 죄 짓지 마”라고 하면 바로 “아멘”이라고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우리가 육체에다가 버릇을, 내용을 만들어야 합니다. 피와 살을 바꿔야 합니다. 뽑고 세워놓고 또 뽑고 세워놓고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울고불고 실패하고 포기하고 타협하고 돌아오고 하면서, 하나님이 안 놔줘서 끝까지 갈 수밖에 없는 길을 걷게 되어 있습니다.
--- 「07 욥_ 전통보다 크신 이가 있다」중에서
법이 인격의 손에 붙잡혔다는 것을 모르면, 즉 그 법을 만드시고 적용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모르면 우리는 스스로 불안하고 힘들 뿐 아니라 그 누군가를 그 법칙으로 붙잡아 나를 편하게 하는 데밖에 그것을 쓸 줄 모릅니다. 세 친구들은 옳은 말을 하지만, 그것을 적당하게 쓰지 않는 자들입니다. 욥이 자꾸 하는 불평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는 내 친구 아니냐? 어쩌면 이렇게 비정하게 구느냐?’였습니다.
--- 「16 소발_ 너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중에서
욥기가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간단한 종교, 우리가 원하는 간단하고 단순한 신이 될 것을 거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선에서 타협하시지 않기에 우리에게 고난이 옵니다. 우리는 남들이 어려움을 당하면 쉽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에게 무슨 뜻이 있을 거예요.” 고난 당해보시면 그 말이 제일 듣기 싫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에게 무슨 불의가 있겠느냐?” 그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시 119:75). 우리는 주의 심판이 의로우시다는 말을 아무데나 써먹습니다. 그런데 그 의로우심은 무엇으로도 옵니까?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으로 온다는 말입니다.
--- 「21 빌닷과 욥_ 하나님의 높으심을 달리 말하다」중에서
사랑은 가슴 뛰는 것이 아니라 죽을 것 같은 것입니다. 정열에 불타서가 아니고 소원에 불타서가 아니고 사랑이 뭔가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 고통을 당해야 하고 손해를 봐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은 상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에게 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내 마음 같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달라는 것 다 해 줄 테니 내 말 들어!”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 「24 엘리후_ 내가 사심 없이 말하노라」중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욥이나 세 친구는 다 인과응보라는 법칙 아래에 묶여 있는 신앙 이해였는데 하나님이 등장하셔서 우리가 볼 때 필요 없고, 잘못되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일들, 예를 들어 낮과 밤에서는 밤, 형통과 고난에서는 고난, 의와 불의에서는 불의, 그다음에 성공과 비교하면 실패, 이렇게 이분법으로 나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는 결코 없어야 하는 게 아니라고 답하기 때문에 욥기의 결론이 어려운 것입니다.
--- 「32 욥_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일하십니다」중에서
우리는 욥기 전체를 관통하여 하나님이 한 발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는 느낌을 가집니다. 고난을 당하는 욥을 두고 사탄과 내기를 하는 하나님, 친구들과 욥의 논쟁을 지켜보는 하나님, 제삼자의 입장에서 욥이 어떻게 하는지 심사위원처럼 지켜보던 하나님이 이제 폭풍 속에서 나타나셨다는 것은 사실 그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만드시고 개입하심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 「34 고난, 세상과 다른 기독교의 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