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톡홀름의 거리 풍경도, 인심도 어릴 적 지리시간에 배우며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그런 곳만은 아니었다. 좁은 뒷골목을 양편으로 메운 단조로운 회색빛 건물들을 가진 이 도시는 외국인의 틈입을 거부하는 듯 차가워 보였다. 그 건물들에 박힌 유리창들은 온기 없는 북구의 태양빛을 흐릿하게 반사하고 있었고……. 금발 머리에 콧대가 우뚝하고 키가 크며 억센 뼈대를 가진 게르만 민족의 혈통대로 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남들에게 무관심하고 냉담해 보였다. 거리를 걷는 행인들의 얼굴에 박힌 청색과 녹색, 회색 눈동자가 유리구슬처럼 무채색으로 번쩍이며 내 시선과 부닥칠 때 그들 눈에 어린 알 수 없는 경계심을 느낄 때마다 내가 만리타향에 돌멩이처럼 혼자 몸으로 굴러온 뜨내기라는 사실을 진저리치듯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 p.86
-그런데, 나는 문득 그녀(나혜석)의 앞길이 비극으로 끝날 것 같은 불안감이 드는 것이었다. 완강한 유교적 구습과 봉건적 분위기로 가득 찬 조선사회에서 그녀의 불꽃같은, 하지만 무모한 도전은 끝내 싹이 잘려 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느낌이었다는 거다. (…)신여성을 자처하는 우리들이라면 일반 여성들과 반걸음 앞에서, 때로는 보조를 맞춰가며 손을 잡고 걸어가며 수많은 조선의 가부장들이 쳐놓은 덫을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 p.129
-음악이 끝났다. 황태자는 내 손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가만히 껴안았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내 이마에 와 닿았다. 꺼칠하고 마른 입술이었다. 나는 훅 하고 호흡을 멈췄다. 가슴이 쿵하고 거세게 뛰면서 술에 취한 듯 눈앞이 어찔해졌다. 그의 입술이 머뭇머뭇 미간 아래로 스쳐 내려오는 것 같더니 어느 순간 멈추었다. 이게 그가 내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선물이었으리라.
“영숙, 잘 가오. 신의 가호가 그대에게 영원히 머물기를……”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나는 서전에서의 내 시간이 드디어 끝났음을 실감했다. --- p.249
-“안아줘요!”
그는 처음엔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한 눈치였어. 머뭇거리며 내 기색을 살피겠지. 나는 다시 속삭였지.
“미스터 로이. 날 안아줘요!”
이윽고 그가 내게 한발 다가왔어. 그리고 두 손으로 조심스레 내 두 뺨을 감싸 쥐었어. 그리고 천천히 그의 얼굴이 다가왔어. 나는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축축하지는 않았지만 부드러운 감촉이었어. 우리는 입술을 맞대고는 잠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가만히 서 있었지. 이윽고 그의 팔이 슬며시 뒤로 뻗더니 내 등을 감싸 안았어. 그리고는 격정적으로 내 입술을 빨아당기기 시작했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았고 이 지상에는 그와 나 둘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어.
입술을 뗀 그가 내 귀에 부드럽게 속삭였어.
“영숙. 당신을 그냥 보내기 싫어. 오늘 나랑 함께 있어요.”
나는 대답 없이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어.
아라비아 해의 검은 파도가 뱃전을 때리고 멀리 흘러가고 있었어.--- p.301
-“글쎄, 우리 신문사는 당분간 기자를 뽑을 계획이 없습니다. 요즘 언론사 사정들이 안 좋아서……. 형편이 풀릴 때까지 좀 두고 봅시다”는 소리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고 어떤 사람은 아예 자기네 신문은 여기자를 뽑지 않는다고 잘랐다. “아니, 최 선생 같은 재원이 뭐 하러 신문 기자를 하려고 합니까. 좋은 일자리가 쌔고 쌨을 텐데……”하고 눙치며 화제를 돌려버리는 이도 있었다. “그럼, 그 좋은 일자리를 제게 한번 소개해 주세요”하는 말이 목구멍에까지 올라왔으나 나는 참았다.
한번은 어떤 신문사 사장실에 가서 취직 이야기를 꺼냈다가 퇴짜 맞고 돌아서는데 사장이란 자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흥, 서전서 대학을 졸업했느니 어쩌니 나대지만 저런 여자를 얻다 써먹나? 공부 좀 했답시고 되바라져선 시키는 일에 콩이야, 팥이야 토를 달고 대들면 귀찮기나 하지.”
되돌아서서 따지고 들까 하다가 나는 못 들은 척 돌아섰다. 그렇게 한들 그의 편견을 확신으로 바꾸어 줄 뿐이었다. --- p.365
-그리고……로이의 따뜻하고 투명하던 몸, 그가 내 몸 속에 들어올 때 어쩔 수 없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던 달뜬 신음. 너무 깊숙해서 슬퍼 보이던 그의 눈빛. 영숙, 우리 1년에 한번은 꼭 만나야 해. 당신의 나라와 내 나라가 독립하고 나면 모든 걸 잊어버리고 하얀 나무 울타리 위로 종려나무가 우거진 집에서 함께 살자구. 예쁜 아이의 양 손을 나눠 쥐고 종려나무 우거진 야자수 사이 해변로를 천천히 걸어.
“아니, 이 색시는 여주댁 큰 딸 아냐?”
“그러쎄, 서전서 유학하고 왔다던 그 멋쟁이 처녀구먼. 몇 달 안 보인다 했더니 이 꼴이 뭐람. 아유, 배가 북통만 하네……색시, 색시 정신 차려봐.”
노파들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웅웅거렸다. 노란 하늘이 빙빙 돌며 쏟아져 내렸고 나는 까무룩 정신을 잃어갔다. 뱃속에서 아이가 꿈틀하더니 내 배를 거세게 찼다.
--- p.388